산티아고 순례길의 중간중간에는 작은 마을을 통과하게 되고 그 마을들에는 순례자들이 쉬었다 갈 수 있는 BAR들이 있다. 전형적인 모습을 하기도 하고 독특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BAR들도 있다. 처음에는 낯섦 때문에 머물지 못했는데 중간부터는 커피를 한 잔 마시거나 간단히 허기를 채우기도 했다. 아주 작은 마을들은 오직 순례자들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바 들을 제외하고 빈집들이 많이 보이는 경우가 특히 그랬다.
바 중에는 제공하는 음식이나 음료에 따로 가격을 책정하지 않고 도네이션으로 운영하는 곳들도 있었다. 과일이나 간식들이 테이블에 진열되어 있고 원하는 만큼 요금을 낼 수 있는 바구니나 통 같은 것이 함께 놓여있었다. 때로는 주인이 다로 있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트라야 카스텔라에서 사리아로 가는 길 중간에 있었던 한 바는 그런 도네이션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었다. 발걸음이라는 관성은 크게 필요하지 않으면 양 옆으로 보이는 바들을 그냥 지나치게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유독 이 바는 시선을 사로잡고 마음을 붙잡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안 쪽 공간이 비밀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과일이나 하나 먹고 가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진열되어 있는 여러 음식 중에 귤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구니에 동전으로 30센트를 넣었다. 순례길에는 옷을 입고 벗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배낭을 자주 뒤적거려야 했는데 과일을 먹는 김에 자리에 앉아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정비를 하려고 했다. 그 찰나에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 나긋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건넸다.
" 커피 한 잔 드릴까요? "
우아함. 커피를 권한 분은 여성분이었는데 그분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딱 하나의 단어는 우아함이었다. 상냥한 웃음에 친절한 말투, 하늘하늘 거리는 월남치마. 인품과 자태 내면과 외면이라는 측면 모두에서 우아함이라는 단어는 이런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예상치 못한 커피를 마시게 되어 그 공간에서 머무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바나나를 하나 더 가져다가 먹기 시작했다. 서로 모양이 다른 의자와 테이블들이 적당히 떨어져 둘러져 있는 안뜰은 약간은 판타지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양인들과 더불어 한국사람들도 꽤 많았는데 그때까지 한 두 명씩 국인들을 마주치거나 짧게 인사하는 경우가 있긴 했는데 한 공간에 꽤 많은 한국인들이 있던 곳은 그곳이 처음이었다.
" 어디 사셔요? "
" 아 저는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
" 아 그렇시구나 나는 시골사람이에요. 목포. 내가 도네이션 많이 했으니까 많이 먹어요."
" 아 아닙니다. 저도 내야죠.(웃음) "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던 한 선생님은 그렇게 처음 보는 사내에게 친절을 베풀기도 하였다. 그러다 커피를 권했던 주인 여자분이 다시 내 자리로 쪽으로 왔다. 두 손으로 들고 있는 쟁반에는 여러 잔의 커피와 간식이 놓여 있었다. 커피는 잼 통으로 쓰였을 것 같은 작은 병에 담겨 있었고 같이 먹을 수 있는 작은 조각의 빵도 있었다. 각각의 빵 위에는 조그마한 꽃가지 하나가 수놓은 것처럼 살포시 올려져 있었다. 그냥 내어주는 음료와 간식 치고는 그 안에 정성을 많이 담고 있다는 것이 이곳저곳에서 느껴졌다. 비타민이나 챙기고 가자는 생각이었는데 그런 대접을 받으니 이곳에 들르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커피를 다 마시는 것으로 끝이 날 것 같았던 그 공간에서의 시간은 또 한 명의 한국분과의 대화로 한 번 더 연장이 되었다. 그것은 짧게 주고받는 것이 아닌 충분하고도 깊은 순레자들끼리의 대화였다. 그분은 나와 달리 프랑스길의 시작점인 상장 피드포트부터 출발해서 벌써 몇 십일을 걸은 상태였고 또 나와 달리 혼자가 아닌 처음부터 그룹으로 순례길을 걷고 있는 분이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사연으로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느끼고 또 무엇을 얻고 있는지. 나이와 성별을 넘어 순례길을 걷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공감대 위에서 대화는 오고 가고 또다시 오고 가며 가는 시간이 붙잡히는 듯 느끼게 했다. 서서 대화를 시작하던 그 분과 나는 내가 커피를 마셨던 그 자리에 어느새 앉아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나 그중 기억나는 한마디는 "걸을 때가 제일 좋아요."였다. 걷고 머무른다는 순례길의 두 가지 큰 덩어리 중에서 조금 더 본질을 담고 있는 '걷는 시간'이 가장 자유롭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나 또 한 십분 동의하는 대목이었다. 걷고 있을 때 무엇보다 큰 충만함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 공간에 머무는 시간은 그렇게 속 깊은 대화까지 종료된 후에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분이 가장 좋다고 말씀하셨던 그 '걸음'을 이어가야 했다. 순레길에서 배우는 것 중 또 한 가지는 떠날 때가 되면 떠나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다시 길을 떠나며 후원금을 넣는 바구니에 70센트를 더 집어넣었다. 충분한 금액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에 집어넣었던 30센트에 더해 1유로는 지불을 해야 이 공간에서 받은 가치에 상응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