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소주, 세상에 대한 한탄은 그것으로 시작된다. 정치, 경제, 대기업, 귀족 노조라는 등, 정치인이 정치를 하지 않고 밥그릇과 세력 지키기에 취중 한다는 등, 특유의 한 서린 기운과 그것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세상의 부정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공기는 부정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아버지는 본인 또한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아실까 모르겠다. '경제가 어려우니 일용직 노동자들이 부정적인 생각만 한다.'라는 말을 할 때. 부정의 상대성이라는 스스로 규정한 개념이 어렴풋이 머리에 자리 잡혔다.
대화의 유용성은 어디서 나올까? 부정으로 가득한 대화는 쓰임이 있을까? 세상 모든 것, 쓸모없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부정적인 기운에서 지겨움을 느낄 때가 있고, 나 마저 그런 모습을 닮아 있다고 느낄 때 자기혐오가 찾아온다. 어쩌면 내가 자기혐오를 종종 느끼는 것은 내 뿌리에 대한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의 다른 모습으로의 표출이 아닐까 생각들 기도 한다.
사람은 언제나 격차 속에 살아간다. 그 격차가 해소됨을 바라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격차의 양단을 이루는 것이 현실과 이상이다. 그 안에서 방향성은 현재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현재를 이상에 닿게 하려는 노력, 둘로 나뉜다. 이상을 설정하지 않거나 현실을 이상에 끌어올리는 것이다. 간극은 이 두 가지 만으로 해소된다. 그리고 되도록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 간극 자체를 탓하는 모습이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생각해오는 중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모습이 이 세 번째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 그것을 싸잡아서 틀린 것으로 규정하기가 불편해진다. 뿌리에 대한 비판의 어려움이다.
그런 한탄으로 무엇인가 해소된다면 그것 또한 무의미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그것이 마음의 부정을 해소한다면 쓰임은 있겠다. 하지만 그 덕에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은 어찌해야 할까. 부정은 유용성이 있을까? 부정을 쏟아낸 공기의 무거움이 스스로를 다시 부정으로 짓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