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정신과 시차의 방]
몸은 무거웠지만 어쨌든 비행기를 타기 전 공항에서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나는 발을 옮겨야 했다. 꽤 딱 맞는 초록색 운동화와 검은색 자전거용 바지, 회색 후드티와 하얀색 바람막이가 출발할 때의 나의 옷차림이었다. 인터넷에서 5만 몇천 원을 주고 산 바람막이는 재고가 없다는 이유로 더 비싼 제품으로 교환 배송받았었는데 프리사이즈로 품이 꽤 넉넉하여 살짝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는 모양새였다. 옷 앞부분에는 찍찍이로 열고 닫는 큼지막한 주머니가 달려 있었고 양 옆에도 지퍼로 된 주머니가 있었다. 엄마는 꽤나 펑퍼짐한 옷을 쳐다보면서 옷이 왜 이렇게 크냐고 묻고는 했다.
기내에 가지고 들어갈 가방은 자전거에서 분리된 옅은 풀색의 페니어 백(자전거 짐받이에 결합이 가능한 여행용 가방) 세트였다. 굳이 세트라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두 뭉치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메인의 역할을 하는 큰 가방은 대칭의 수납공간이 자전거 짐받이 양 쪽 아래로 늘어지는 형태였고 자전거에서 떼어내어 손으로도 들고 다닐 수 있도록 가운데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또 다른 뭉치는 짐받이 위에 수평으로 얹히는 비교적 납작한 가방이었는데 메인 가방과는 플라스틱 버클로 결합될 수 있었고 따로 긴 가방 끈이 있어서 분리하면 크로스백 형태로도 매고 다닐 수 있었다. 이 크로스백은 내가 가지고 갔던 모든 가방류의 물건 중에서 유일하게 휴대성이 담보되는 가방이었다. 그래서 자전거를 두고 도시 관광을 할 때에 꽤나 유용한 역할을 했었다.
자전거 여행은 말 그대로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가방이나 케리어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또한 백팩을 멜 수도 없었는데 뭔가를 등에 맨 채로 자전거를 80km씩 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류의 가방은 짐받이에 결합되어 여행자가 끌고 가는 형태가 되는, 마치 말이 마차를 끌 듯이 두 다리로 모든 무게를 이끌어가야 하는, 말하자면 다리는 힘들어도 몸 자체는 무거워지면 안 되는 구조가 돼야 했다.
자전거 박스에 넣은 침낭, 텐트, 매트 및 그 외에 자질 구래 한 품목들(방수포랄지 여행 중에서 자전거를 분해해서 들고 다녀야 할 때 쓰는 천 재질의 캐링 백, 그물망 등)을 제외하면 모든 여행용품들은 전부 이 페니어 백에 나누어 넣은 상태였다. 크로스백에는 자주 꺼내야 하는 물품들을 넣었고 그 밖에 당장 쓰지 않을 것들은 메인 가방에 넣었다. 이를테면 스마트폰이나 이어폰, 블루투스 키보드, 책, 여권, 해외 유심 등은 크로스백에 넣었고 의류 등은 메인 가방에 넣었다. 메인 가방은 손으로 들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같은 무게여도 등에 짊어지거나 케리어로 끄는 것보다 훨씬 무거운 느낌이었다. 의류라고 해 봐야 자전거 옷을 빼면 트레이닝복과 티셔츠 한 장 밖에 없을 정도로 짐을 간소화했는데도 들고 있으면 손바닥이 꽤 묵직해져 왔다.
크로스백을 몸에 걸치고 패니어 백을 손에 든 나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몸을 옮겼다. 공항에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항공사의 체크인 카운터와 그 사이를 이루는 공간들에도 무리를 이루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진 않았다. 아마도 시간이 해외여행을 떠나기에는 좋지 않은 일요일 오전이었던 터라 한산한 공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유독 유심을 수령했던 업체 부스 근처에만 꽤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출장이었긴 해도 올 초에 연변을 다녀온 것은 다행이었다. 인천공항을 방문한 지가 몇 개월 되지 않아 곳곳이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해외를 처음 나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많은 것들이 낯설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일단은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는 무슨 일들이 펼쳐질지 그림을 그려 볼 수 있었다.
여권과 티켓을 검사받은 나는 공항 검색대 쪽으로 들어갔다. 안 쪽을 보니 지그재그로 놓인 바리케이드를 따라 사람들도 지그재그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사람이 적어 보이는 쪽을 찾으며 나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차례가 됐고 나는 익숙하다는 듯이 가방을 바구니에 넣었다. 가지고 있던 핸드폰이나 주머니에 든 잡다한 물건들은 또 다른 바구니를 챙겨 한 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이때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입고 있던 하얀색 바람막이가 일반 재킷처럼 가운데가 완전히 갈라지는 게 아니라 자크가 명치 부분에서 멈추는 독특한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보통 검색대에서 외투는 꼭 벗어야 하는데, 이게 외투라고 하기에도, 또 그렇지 않다고 하기에도 뭔가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외투로 규정하면 벗어야 할 일이고, 일반 티로 규정하면 굳이 안 벗어도 될 일인데 벗는 행위로 보면 내의와 같았고, 모양새나 본래의 기능으로 봐서는 누가 봐도 외투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그 순간 나도 이 옷을 외투라고 규정하긴 했으나 동시에 이 옷을 머리 위로 벗어야 된다고 생각하니 뭔가 거추장스러움이 느껴져 귀찮음과 거북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속으로는 이미 바람막이를 외투로 규정했으면서도 일단은 입고 있다가 검색대 직원이 요청할 경우에만 벗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려와는 다르게 검색대 직원들은 바람막이를 벗지 않는 것에 대해 지적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했다. 엑스레이를 통과하여 투시된 페니어 백 사진을 본 직원이 가방을 열어 봐도 되는지 물어온 것이다. 아마도 사진 상으로 판단할 때 뭔가 기내에 들고 가기에는 부적절한 물건이 그 안에 들어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 가방 좀 열어봐도 될까요? "
" 네 열어보세요. "
직원이 가방을 열어도 되냐고 물어온 그 순간에는 또 다른 걱정도 조금 들었다. 이 페니어 백이라는 게 수납공간이 다양하지 않아 분류에 따라 물건을 완벽히 나눠서 넣지는 못했는데 직원이 가방을 뒤적이다가 민망한 물건이 나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문제의 물건과 속옷이 같은 주머니에 들어있거나 할 경우 창피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짐을 싼 게 바로 전날 밤이었지만 물건들을 정확히 어떻게 분류해서 넣었는지 상세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직원은 벌써 이리저리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검은색 천으로 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면서 나를 쳐다보고는 물었다.
" 이게 뭐죠? "
" 아, 자전거용 백미러입니다. "
문제의 물건은 자전거용 백미러였다. 안 그래도 이걸 페니어 백에 넣을 때 꽤나 고민을 했었다. 거울면과 자전거를 잇는 연결부위가 비교적 얇고 길쭉하게 생긴 터라 탑승 규정에 어긋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흉기로 쓰일 수 있을 만큼 날렵한 모양을 하고 있는 물건들에 대해서는 기내 반입을 제지받을 수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일전에 연변 출장에서 돌아올 때도 다른 사무실 직원분이 아이젠을 중국 공항에서 빼앗긴 것을 본 경험이 있어서 걱정이 더 들었던 것이다. 물론 가지고 있던 백미러가 아이젠만큼 뾰족하지는 않았지만 보는 이에 따라 충분히 위협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는 했었다.
백미러는 자전거 박스에 넣어서 위탁수하물로 함께 보내는 게 더 속편 할 일이었긴 했지만 수하물 규정 때문에 맘 편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야 포장된 자전거 박스가 23kg이 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초과 운임을 부과받지도 않았었지만 포장을 할 때로서는 그런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었다. 제한된 무게 안에 최대한 물건을 채워본다고 이것도 넣어 보고 저것도 넣어보고, 또 반대로 빼기도 하면서 최종적으로 몇 가지 물건을 자전거 박스가 아닌 페니어 백에 챙겼는데 그런 물건들 중에 백미러도 포함돼있었던 것이었다.
주머니에서 백미러를 직접 꺼내본 직원은 잠시 동안 물건을 이리저리 쳐다보더니 이내 별 무리가 없겠다는 듯이 다시 백미러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여행을 먼저 하고 있던 친구로부터 적어도 좌측 백미러는 꼭 있어야겠다고 이미 이야기를 들었던 상태라 혹시나 뺏기기라도 하면 어쩔까 생각했었는데 이래저래 다행인 일이었다. 백미러를 포함해 뒤졌던 가방까지 돌려받은 나는 이미 바구니를 통해 먼저 X-ray검사를 받고 나온 자질 구래 한 물품들을 다시 주섬주섬 챙겨 주머니에 넣어 탑승구로 갈 채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