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빈정이 상한 일을 다시 할 생각을 하는 것은 때로 어렵다. 구상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음을 느낄 때, 그때까지 투여된 에너지가 가치를 다 잃지 않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계획도 유동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결정이 완벽하지 않음을 느끼게 되면 그 불완전성을 탈피하기 위해 쌓인 결정 모두를 철회하기도 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미생의 말마따나 곤마에 빠진 수는 죽게 놔두는 동시에 그다음 수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이지 그 존재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때로는 엎어지면 엎어진 대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시간과 자원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완벽함을 추구하느라 타임라인을 자꾸 처음으로 돌리게 되면 영원히 매듭과 결론을 짓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행이 고민보다 더 중요하고 계획대로 되지 않음을 담대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너무 확고해지지 않아야 하는 동시에 또 너무 줏대 없이 굴어서도 안된다. 언제나 상황을 유연하게 맞이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때 스마트폰을 구매하는 것이 맞는 결정이었을지 모른다. 어차피 사기로 마음먹었다면 다른 업체를 통해서라도 스마트폰을 구매했을 것이고 업계가 보편적으로 그렇게 돌아간다면 어떻게 알아본다고 한들 애초에 그 정도 가격 선에서 스마트폰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을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조금 빈정이 상했다고 하더라도 진행되던 프로세스 자체를 중단한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었던 것 같다. 마치 수 하나를 잘못 두었다고 바둑 한 판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지점은 내가 사회에 대해서 꽤 불만을 갖는 지점이기는 했다. 합리성이 결여된 것들을 만나게 되면 왜 우리 사회는 그런 시스템으로 밖에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작은 한숨이 나온다. 이런 상황을 만났을 때의 대응은 크게 두 가지, 해결할 노력을 부리는 것과 상황을 그저 회피하는 것일 텐데 그 순간 나는 그냥 회피를 선택했던 것 같다. 내키지 않는 기분을 또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제주도 워크숍이 가까워와 더 알아볼 시간과 여유가 많지 않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카메라 성능도 변변치 못하고 메모리도 16GB밖에 되지 않는 보급형 중저가 스마트폰으로 여행을 전부 버텨냈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가 된다. 나는 32GB짜리 마이크로 SD카드를 구매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메모리 부족은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해결책으로 카메라 성능 향상을 도모할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보정 어플을 잘 활용하여 좋은 사진을 남기자고 생각을 했었다. 스스로 자초한 상황이니 그 수고로움까지는 앉고 가자 하는 마음이었다.
검색대 검색 절차를 마친 나는 출국장 바로 앞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륙 시간까지는 30분에서 1시간 정도가 남아있는 시간이었고 주변에는 영국인으로 추정되는 외국인들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탑승할 비행기의 항공사가 영국항공이었기 때문에 아마 보이는 외국인의 대부분이 영국인이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비율로 보자면 외국인과 한국인이 반반 정도로 출국장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전체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전날 피곤에 지쳐 구글 오프라인 맵을 다운로드 하는 걸 포기했다고 했었는데 사실 근본적으로 구글 오프라인 맵을 다운로드하려 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그 편이 온라인 모드로 사용하는 것보다 더 안정적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항에서 구입한 해외 유심으로 현지에서 인터넷을 쓸 계획이었지만 한국만큼 모바일 인터넷이 빠를지 확신할 수 없었고 또 자전거 여행의 특성상 도심이 아닌 곳을 이동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매끄러운 수신이 될지 안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본질은 언제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는 확실한 지도의 확보였다는 이야기다.)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그래서 구글 오프라인 지도를 다시 다운로드할까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절차를 알아보고 다운로드까지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다운로드한다면 전 세계의 지도 정보를 모조리 받게 될 텐데 그 용량이 방대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만큼 다운로드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걸 대체하는 방법으로 내가 여행할 각국의 지도 어플을 마구 다운로드하기 시작했다. 스위스부터 시작해서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까지 한글과 영문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어플들 중 가장 다운로드 수가 많은 어플들을 골라 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도뿐만이 아니라 관광지 정보를 알 수 있는 어플도 수집해나갔다. 사실 자전거와 관련한 사항을 준비하느라 구체적으로 어떤 곳을 방문할지 크게 준비를 안 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전거 여행이 관광지를 가는 콘셉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요한 유적지 몇 군데는 가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플을 하나 둘 다운로드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스마트폰에 용량이 부족해 어플을 다운로드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32GB짜리 SD카드를 스마트폰에 넣기만 하면 기존 용량이 부족할 때 자동으로 SD카드에 어플을 설치하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을 켠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이야기인즉슨 SD카드로 어플을 바로 다운로드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이미 다운로드한 어플을 SD카드로 옮길 수는 있지만 해당 어플을 업데이트하게 되면 그 어플이 메인 메모리로 자동 원대 복귀한다는 설명이었다.
이건 꽤나 피곤할 일이었다. 왜냐하면 어플이라는 것이 와이파이만 연결되면 자동으로 업데이트를 실행하기 때문에 그걸 일일이 다 막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또 막아진다고 할 지라도 그렇게 되면 업데이트를 아예 안 하고 어플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불편할 일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여하간 썩 양하지 못한 상태로 스마트폰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 즈음되니 약간의 스트레스가 올라왔다. 스마트폰과 관련해서 최선과 차선이 모두 말썽을 부리니 참 뭐하나 내 맘대로 되는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행기간 동안 쓰지 않을 어플을 지우거나 아니면 업데이트가 필요 없는 어플만을 골라서 SD카드로 보내 상황을 일부 해결할 수도 있었겠지만 벌써 그런 차차선까지 생각해야 된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조금은 피곤하게 만들었다. 단위 시간당 발휘할 수 있는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비행기 탑승시간은 거의 임박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