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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Feb 19. 2021

엄마의 잃어버린 이름들을 되찾는 이유

네 이름이 뭐니?

이름을 잃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난 참 어렸을 때부터 어떤 직함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반장~"이라고 불러주면 괜히 뭐든지 더 잘해야 할 것 같았고, 그 이름은 내가 학교생활을 신명 나게 하는데 날개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누가 들어도 무릎을 탁! 칠만한 이름 있는 대학을 가기 위해, 대학을 가서는 사실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른 채, "우리 딸 여기 다녀", "ㅇㅇㅇ대생입니다"라는 한마디로 나라는 사람의 소개가 끝나는 그 편리함이 만족스러웠다.


대학을 다닐 때는 졸업하고 나서 '직업'으로 불리고 싶었다. 난 아무래도 문과가 적성에 맞으니 로스쿨을 가기로 했는데, 방학 때 한국에 들어와 광화문 로펌의 인턴생활을 경험하고는, 난 회사 생활은 안 맞는 거 같다며 다른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대학교 때 잠깐 치아교정을 하고는 그때 치과 의사 선생님의 모습이 좋아 보여서, 무작정 그럼 치대 대학원을 가야겠다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전공을 바꾸고, 그와 관련된 모든 수업을 듣고, DAT라는 치대 시험을 보고, 치대에서 왜 날 뽑아줘야 하는지 그야말로 쥐어짜는 에세이를 써가며, 울며 불며 대학교 3학년과 4학년을 보냈다. 나는 문과인데 적성에도 안 맞는 이과 공부를 하자니 매일매일 죽을 맛이었고, 바늘이랑 피를 못 보는 내가 사람을 째고 꿰매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늘 회의가 들었다. 그래도 공부를 하던 요령은 있어서 어떻게 어떻게 점수는 맞췄으나, 내가 이대로 치대를 갔다간 걸어 들어가서 죽어 나올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방황을 하다가 스탠퍼드에서 교육학 박사를 하던 대학 동기가, "너도 잘할 것 같은데, 한번 지원해봐"라는 한마디에, '그래 맞아. 박사를 해야겠다'라며 반년 정도 준비해서 일단 교육학 석사를 준비하니 또 덜컥 합격해버렸다. 사실 문외한인 분야였는데, 어쨌든 시험을 보면 점수는 나오고, 그동안 이것저것 쌓아온 경력들과, 학부의 네임밸류가 더해져서, 원서를 넣으면 뭐라도 되는 거였다. 알고 보면 이것이 비극이었다. 왜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변호사, 의사, 박사 같은 직업이 내 정체성이 되는 줄 알고 달려가는데, 또 하겠다고 가보면 이유를 모르고 하니 공허함밖에 없었다. 같은 공부를 해도 목적과 소명의식 갖고 하는 친구들은 달랐다. 지치지 않았고, 실패해도 금방 다시 일어났다.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싶은지, 나는 누구인지 모른 체, 세상에서 인정해 주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인정 중독에 시달리며 향방을 모르고 뛰어다녔을 때, 어느 날 문득. 내 인생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나에게는 "엄마"라는 또 다른 이름이 생겼다. 이제 갓 돌이 지난 첫째를 맡겨두고 대학원을 다니고, 박사를 하겠다고 연구실에 매여 있느라 둘째 모유 수유를 제때 못해 유선염을 달고 살기도 했다. 살기는 엄청 열심히 사는데, 나는 왜 이리 늘 불안할까. 나는 대체 무엇을 하려고 태어났을까.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근심 걱정 하나 없이 제 앞가림 잘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내 안은 텅 빈 공갈빵처럼 매일매일 부서져 내렸다.


엄마가 되고 나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내가 나 스스로 누구인지 잘 모르는데, 내가 내 아이에게 너는 누구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였다. 다시 말해, 엄마가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아이의 자아가 엄마의 자아가 된다. 아이를 아이로써 독립된 개체로 보는 게 아니라, 나의 또 다른 분신으로 본다는 이야기이다. 나의 상처가 아이의 상처가 되고, 나의 꿈이 아이의 꿈이 될까 봐, 더 이상은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그 길로 막바지에 이르렀던 박사 지원과 원서를 다 철회하고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시작됐다.


이름을 찾아 드립니다.

첫째가 네 살 정도 되었을 때, 알파벳과 이름을 가르쳐준다고 샀던 동화책이 하나 있다. 자신 아이의 이름에 맞게 자체 제작할 수 있는 동화책이었는데 제목이 "The Little Girl Who Lost Her Name"이었다. 글의 내용은, 자기 이름을 잃어버린 여자아이가, 자기 이름의 스펠링 (예를 들면 E-M-M-A)을 하나씩 찾아다니며 자기 이름을 모아서 마지막 장에 가면 자기 이름을 찾게 된다는 내용이다. 동화의 취지는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 이름에 있는 알파벳들을 배우며 본인의 이름을 인지하고 '난 내가 누군지 알아요!'라는 걸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 같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여자아이는 거대한 산을 넘기도 하고, 몬스터를 만나기도 하고, 깊은 바닷속을 탐험하기도 하면서 자기의 이름에 있는 글자들을 하나씩 하나씩 "얻어낸다." 정말 그랬다. 내 이름을 얻어내는 일은 누구도 대신 알려줄 수 없고, 누구의 길도 따라갈 수 없는, 내가 한 글자 한 글자씩 발견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그냥 되는 대로 살면 되지, 네가 호강에 겨워서 별 고민을 다 하는구나"라는 사람도 있었고, "난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봤는데.." 하며 나를 복잡하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몰라서 너무나 많은 곳을 돌아왔던 나로서는, 어쩌면 세상엔 아예 자기 이름이 잊혔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나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삼성맨입니다. 저는 의사죠. 저는 누구누구 엄마예요 -라고,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집단이나 직업에 종속된 이름 뒤에 숨으며, 거울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이 말이다.



산 위의 마을에서 이름을 발하다.

얼마 전 꿈을 꾸었다. 나는 어떤 높은 절벽 위에 서있었는데, 내 앞에는 아주 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어찌나 희망차게 푸르고 반짝이는 금빛 윤슬로 가득하던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몇 마리의 돌고래들이 물 위로 뛰어오르며 빠르게 헤엄을 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꿈속에서 나는 '오! 저 아이들을 올라타고 나도 저기서 같이 수영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다 꿈에서 깼다. 아직도 생생한 그 장면을 떠올리며, 내가 얼마나 그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지, 나만이 가지고 있는 내 안에 돌고래들을 깨워서 얼마나 신나게 뛰어놀고 싶은지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랬다. 나만이 가진 온도를 품고, 나만이 낼 수 있는 색을 발하며 살기보다는, 늘 남들이 제일 좋다는 색, 요즘 제일 잘 나간다는 색, 어디서나 받아준다는 색만을 스스로에게 덧입히며 살았다. 그 색이 더 이상 내 색이 아니라는 건 알았는데, 내 안에 빛깔을 내어 보이기에는 무엇을 하기에도 두려움이 앞섰다. 너무 오랫동안 감추어둬서 색이 바랜 것 같고, 더 이상 빛 나 보이지도 않았으며, 그래서 가진 게 고작 그거냐고 모두가 비웃을 것만 같았다.


그때 내 안에 떠오른 성경 말씀이 있었는데, "Your life lights up the world. Let others see your light from a distance, for how can you hide a city that stands on a hilltop? And who would light a lamp and then hide it in an obscure place? Instead, it's placed where everyone in the house can benefit from its light. So, don't hide your light! Let it shine brightly before others"이라는 구절이었다. '네 안에 빛이 있어! 잊고 있었구나. 근데 그 빛은 온 세상을 비출만하다?! 그리고 그런 빛은 보통 등잔 밑에 숨겨 두지 않아. 왜냐면 집안에 모든 사람들에게 환하게 비추며 도움을 줄 수 있거든. 그러니까 네 빛을 숨기지 마. 숨겨진 빛은 빛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에이... 그래도 내 얘기는 아닐 거야'라며 그 소리를 다시 외면하던 나에게 갑자기 '네 이름이 뭐니?' 하는 마음이 다시 들었다. '내 이름? 내 이름은 이윤승.. 윤승.. 내 이름은 '빛날' 윤에, '이을'승이야.' 우리 할머니가 작명소에서 30만 원 주시고 지어오신 이름. 남자 이름이기도 하고, 받침도 두 개라 발음하기도, 남들이 기억하기도 힘들다며 못내 못마땅해했던 내 이름이었다. 그런 내 이름이 '빛나다, 그리고 그 빛을 이어간다'라는 뜻이라는 걸 처음 마음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평생을 못마땅해했던 내 빛. 내 안을 들여다보기보다는 내 가슴팍에 달릴 명찰이 주는 빛을 더 사모했던 날들. 실망시키고 판단당할까 봐 등잔 밑에 꼭꼭 숨겨 놓았던 그 빛. 그 빛을 축소하고 두려워했던 이유는 결국 "내가 빛나지 못할까 봐"였다. 하지만 빛의 목적은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닌, 자신을 태워 온 집안을 환하게 하는데 소명이 있다. 그러므로 숨겨질 수가 없다.


이제는 그렇게 빛나고 싶다. 잃어버렸던, 잊혔던 내 이름을 다시 찾으며, 그 빛이 나와 같이 등잔 밑에 숨어 지내던 이름들에게 작게나마 비칠 수 있도록. 그래서 함께 빛날 수 있도록.



• Soli Deo Gl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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