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근교의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아주 조용한 마을이다. 보스턴 시내까지는 20여 분, 케임브리지의 대학가까지는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지만, 막상 이곳에 들어오면 슈퍼마켓 하나, 베이글 집 하나, 작은 로컬 레스토랑들 두세 개 외에는 그 흔한 스타벅스나 아이스크림 가게 하나 없는 곳이다. 대신 새벽이면 앞마당에 토끼들이 바삐 뛰어다니고, 뒷마당 하얀 눈 밭에는 사슴 가족들의 발자국이 이리저리 나있기도 하며, 늦은 밤에는 코요테의 울음소리도 들을 수 있다 (이건 좀 무섭다).
우리 집 오른쪽으로는 자녀들을 다 출가시킨 노부부가 살고 계시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에 세 번씩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를 산책시키는 게 그 부부의 가장 큰 일과이신 듯하다), 왼쪽으로는 우리 아이들 또래랑 비슷한 자녀 둘을 가진 유태인 부부가 산다. 하루는 우리 딸이 오후에 그 집에 놀러 갔다가, "엄마, 클로이 엄마는 롱드레스를 입고 화이트 와인을 마시면서 저녁 준비를 해"라며 와인잔을 손으로 돌리는 흉내를 내면서 말하길래, 무릎 나온 운동복 바지와 파스타 소스가 튀긴 티셔츠를 입고 저녁 준비를 하던 나는 좀 뻘쭘하기도 했다. "유난이다, 얘. 걔네 엄마는 오늘 처음 밥 하나 보지."
우리 집과 가장 왕래가 잦은 이웃은 길 건너 맞은편 집인데, 프랑스인 엄마가 아이들 셋을 혼자 키우는 집이다. 그나마 나랑 같이 외국에서 왔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이 동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나에게 가장 자주 안부를 물어주며 맛있는 크루아상과 블루베리 머핀을 구워다 주기도 하고, 함께 조깅을 가자고 하기도 한다 (그녀는 세계 5대 마라톤을 완주한 전문 마라토너다. 나는 뛰는 운동은 딱 질색이라, 빵만 맛있게 받아먹었다).
우리 스트릿에서 아시안 가족은 우리 가족이 유일하다. 실제로 이 동네의 인구분포도를 보면 백인이 90%가 넘고, 두 번째로 많은 인종인 아시안이 6% 남짓이니, 그 간극이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다. 이곳 공립학교에 다니는 딸은 반에서 유일한 한국인일뿐더러, 학년에서도 유일한 한국인이다. 이곳에 이사 오기 전 동네에서 다녔던 학교는 학 학년에 한국인이 몇 명씩 있음은 물론, 중국 친구들과 인도 친구들이 반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었다. 그러기에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때 혹시나 우리 아이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어려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적응을 했다. 매일 아침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또 끝나고 픽업을 하면서, "오늘 괜찮았어?" "아무 일도 없었어?"라고 다급히 물어보곤 했다. 꼭 무슨 일이 있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치 시한폭탄이 곧 터질 것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사교적이고 활달한 아이는 늘 빙긋 웃으며 오늘은 누구랑 놀았는지, 어떤 게 재밌었는지, 엄마가 걱정하는 시한폭탄은 터지지 않았다는 듯 날 안심시켜주는 말투로 답을 해줬다.
그렇게 처음 몇 달은 아이 학교 앞을 지날 때마다 가슴을 졸이다가 문득, '내가 왜 이렇게 긴장하지?'라는 물음이 들었다. 그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내 명치 한가운데를 저밋하게 옥죄는 그 낯익은 감정이 한순간에 일렁거렸다. 열여섯 살에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그 큰 학교에 나만 한국 아이였을 때. 나만 영어를 못하는 이방인이었을 때. 나 혼자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식은땀 나는 두 주먹을 꼬옥 쥐어봤을 때. 그때의 그 묵직하고도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외로운 비장함이 떠올라서 그런 거였다. 모두가 나에게 친절했지만, 그 금발머리와 갈색 머리들 사이에서 나는 늘 긴장했다. 지금 당장 영어를 못한다고 해서 바보는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더 목을 뻣뻣이 세우고 수학 시간만큼은 손을 번쩍번쩍 들던 (심지어 나 손드는 거 제일 싫어하는데) 그때의 어린 처절함이 다시 나를 찾아온 기분이었다. 물론 내 딸은 한국말보다 영어가 편하고 미국 학교가 더 익숙하지만, 나는 매일 아침 20년 전의 이방인으로 돌아가 아이와 함께 등교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90년대 미국의 커네티컷이라는 작은 주에서는 (특히 사립이 아닌 공립학교에서는) 한국 사람을 찾기가 정말 힘들었다. 처음 노란색 스쿨버스를 타던 그날 아침의 풍경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침 7시, 발밑 잔디밭에는 아직 새벽이슬이 송송 맺혀 있었다. 한국에서는 매일 아침 교복을 입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와 함께 깔깔 웃기도 하고 엄마 몰래 숨겨온 간식을 나눠먹기도 하며 학교까지 함께 걸어갔었다. 하지만 낯선 이곳에서의 나는, 나를 어디로 데려다주는지도 모르는 커다란 노란 깡통을 타고, 각자 씨디플레이어 이어폰을 끼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미국 아이들과 함께였다. 얼른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누가 말 시킬세라 똑같이 창밖을 쳐다보았다. 창밖에는 아무것도 나를 도와줄 수 없는 아빠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계셨다. 내가 학교에 가있던 그 첫날, 아빠는 울렁이는 마음을 잠재울 수 없어, 주기도문만 백번 넘게 외우셨다고 한다. 아마 그때의 아빠 마음이, 지금의 내 마음 아닐까.
한국에서 중학교 3학년을 다니다 온 나는 미국에 와서는 다시 8학년 (한국으로 따지자면 중2)로 들어갔다. 공립학교이긴 했지만 꽤 학군이 좋은 곳이었는지, 학교의 70% 정도가 백인이었고 많은 친구들이 유태인들이었다. 학교 카운슬러가 짜준 스케줄대로 제일 처음 들어간 수업은 "Language Art"라는 시간이었다. 우리말로 따지자면 영문학 시간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때는 이게 영어시간이란 건지(Language) 미술시간이란 건지(Art) 알 수가 없었다. 학교에 외국인 학생이 온 적이 얼마나 없었으면, 나라는 검은 머리 아시안의 등장은 그 영문학 선생님에게 꽤나 당황스러움을 줬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하는 그분의 이름, Mr. Bourque. 내가 영어를 "Hi" 정도밖에 못한다는 걸 아신 후, 날 도와는 주고 싶은데,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들을까 봐, 근데 어떻게 쉽게 풀어 설명할 줄 몰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 벌게졌던 그분의 얼굴이 아직도 떠오른다. 나는 차라리 '어떻게든 따라갈 테니까 너무 제 걱정은 마세요 선생님'이라고 먼저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초등학교의 어린 나이였으면 아이들이 몰려와서 아몬드 모양의 눈을 한 동양인 여자아이를 둘러싸고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을 것 같은데, 이곳은 중학교라서 그랬는지 아이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나를 탐색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대부분 친절했고, 도와주려는 마음들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국에서 에쵸티와 지오디를 듣던 나에게 그들이 듣는 NSYNC 나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너무 생경하기만 했다. 그 날 이후로, 여기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열여섯의 나는, 그 아이들이 드는 책가방, 공책, 필기도구, 입는 옷과, 신발, 머리 스타일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따라 하기 시작했다. 모든 중고생들이 입던 Abercrombie & Fitch는 나같이 팔 짧고 다리 짧은 아시안에겐 늘 너무 길어서 우스꽝스러웠지만, 어쨌든 그걸 입으면 왠지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기도 했다. 또, 생머리인 나는 아침마다 어떻게든 그들처럼 머리에 컬을 넣어서 구불구불하게 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들이 다리미로 펴지 않아도 늘 찰랑이던 나의 생머리를 부러워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몇 년이 훨씬 지난 후의 일이었다).
학교 화장실은 나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고, 그곳에서만큼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필요도 없었다. 늘 칸막이 화장실 안에 들어가, 후우...........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긴 한숨을 먼저 내뱉고 나서야 좀 살 것 같았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기도 했다. '이제 다시 나가야 되는데..' 하면서. 자기 역할을 잘 이해 못하는 연극배우의 휴식시간은 그런 것이었을까.
아마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내 겉모습을 바꿔서라도 어딘가 빨리 속하고 싶고, 그래야 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내가 진짜 누구인지 아는 것보다, 받아들여지고 동화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시절. 그때는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중심을 잡고 살아야 되는지. 나는 정말 누군지. 내가 있는 그대로여도 괜찮다는 것, I am good enough 하다는 것을. 그때 시작된 나의 정체성의 방황은 그저 살아남고 주류에 속하기 위해 고등학교 시절 내내 꾹꾹 눌러오다가, 대학을 가서야 아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정말 누구인지 찾는 여정은 서른 중반이 되서야나 시작이 됐다.
지금의 동네로 이사 온건 2년 전이다. 딸이 막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나서였는데, 가을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동네 친구를 좀 사귀라고 타운에서 운영하는 썸머 캠프에 보냈었다. 차속에서 대충 훑어봐도 대부분 금발머리의 아이들이고, 드문드문 유색인종의 아이들도 보였다. 성인이 되어서 미국에 온 남편은 "애들은 어려서 그런 거 잘 몰라~ 바로 같이 잘 놀 거야"라고 말했다. 그것이 많은 부분 사실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쿵 내려앉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딸도 나처럼 화장실 가서 앉아 있으면 안 되는데..
다행히 2주간의 캠프 동안 씩씩한 우리 딸은 늘 재밌다고 했고, 내년에도 또 가고 싶다고 말을 하길래 '넌 나랑 달라서 너무 다행이다, 얘.'라며 안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캠프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사귄 어느 친구와 잠깐 언쟁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물어보니, "엄마. 걔는 하얗고, 나는 다르잖아. 나는 튀기 싫어. 그래서 문제를 만들면 안 돼. I don't want to stand out. I want to blend in. I don't want to make troubles"이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7살의 아이의 눈에도 보였나 보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건 너무나 익숙한 아픔이었다.
하지만 아플 만큼 아팠고, 그 아픔이 아이에게까지 계속될 필요는 없었다. 엄마로서 내가 정하는 상황의 톤 tone 위에 아이는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갈 것이다. 그 후로, 우리는 이 동네의 방관자가 아닌 주도자가 돼보자고 했다. 우리는 묻혀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들이니까. 딸아이의 친구들을 데려다가 집에서 같이 김밥을 싸고, 돈까쓰를 튀겨먹고, 친구들은 이렇게 맛있는 게 있냐며 자기 엄마한테도 좀 가르쳐달라고 성화였다. 학교 스낵으로는 짭짤한 김을 가져가기도 하고 (한국 김으로 대동 단결했다), 초코파이를 싸갔더니 다른 친구들도 그걸 어디서 구했는지 가져와서 딸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왔던 시절에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넌 중국에서 왔어 아니면 일본?"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면 "그럼 북한에서 왔어 아니면 남한?"이라는 질문이었다. 그때는 한국을 떠올리면 남한보다도 연일 미국 뉴스에 보도되는 북한의 미사일이 미국인들에게는 더 빨리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지금 내 딸은 친구들과 BTS를 듣는다. 블랙핑크 뮤직비디오를 보고 와서는 딸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하기도 한다. 특히 이번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학교에서 모범국의 사례들을 말할 때 South Korea 가 나와서, 반의 모든 아이들이 자기를 보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줬다고 신이 나서 딸아이는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변하지 않은 듯, 많은 것이 변한 세대를 살고 있다. 문제는 내 안에 있다. 내가 어떤 렌즈를 껴고 세상을 바라볼 것인지. 아이에게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게 할 것인지. 우리가 진정 우리가 될 때, Stand out 하는 것이 아니라 Stand up 하게 될것을 믿는다.
딸아이를 학교에 내려다 주며, 아이에게 늘 주문을 외우듯이 말한다. "넌 있는 그대로 충분해. 그냥 너다운 게 제일 좋은 거야. Don't forget to be yourself!!"그러면 아이는 답한다, "아이고, 알았다니까 엄마!!" 이 엄마는 도대체 왜 아는 얘기를 매일 하고 또 하는지, 아이는 알 길이 없다. 그것이 엄마 자신에게 하는 선포임을 말이다.
• Soli Deo Glor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