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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Feb 24. 2021

화장실에서 먹는 밥

초청받은 광야



우리는 때때로 지금 웅크리고 있는 이 척박한 자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몰라 스산한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그 척박한 자리는 어느새 청함 받는 자의 고귀한 자리로 탈바꿈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길에서 주워 먹던 부스러기를, 주인의 상에서 누리는 잔치로 바꾸시듯 말이다.




미국에 온 지 몇 달 안돼 8학년을 졸업하고, 지루한 여름을 보낸 후 고등학교인 9학년이 시작되었다. 사실 미국 고등학교 4년의 생활은 나를 누구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준 자양분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추억과 함께 가슴 저린 감사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영어가 편해지고, 선생님들의 신임을 얻고, 좋은 친구들과 마음을 열기까지 처음 1-2년의 시간은 열여섯의 나에겐 맨발로 홀로 걸어가는 척박한 광야나 다름없었다.


그 시절 유난히 잊혀지지 않는 두 가지 기억이 있다.


첫 번째 기억은 학교를 시작한 지 며칠 안되던 날. 아직 학교의 뉴페이스 인 데다 외국인이기까지 한 나를 탐색하던 몇몇 아이들이 나에게 시비를 걸어온 날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체구도 작고 영어도 못하는데, 눈에서는 레이저가 나올 정도로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고, 기죽어 보이지는 않은데 늘 긴장한 듯 꼿꼿하게 다니니 궁금하기도 했을 테다. (그때 영어 좀 못해도 주책맞게 친구들한테 다가가기도 하고, 발음이 구려도 좀 풀어진 모습도 보이기도 하고 그랬었어야 하는데, '무조건 살아남아야 해. 날 무시하지 못하게 해야 해' 이런 서바이벌 모드라 꽤나 방어적인 태세였던 것이 지금 되돌아보면 참 안쓰럽다). 그들은 헤비메탈 록 밴드의 그림이 그려진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자전거 체인 같은 것을 목에 두른 남자아이들이었는데,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낄낄 거리더니, 내가 얼마나 push around 되기 쉬운지 테스트를 해보기로 한 것 같았다. 그중 한 아이가 맨 뒷줄의 내 자리로 가던 길을 막아섰다. 순간, '올 것이 왔구나'라고 느낀 나는 얼른 예수님의 이름을 한번 불렀다. 붙잡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쉬는 시간이었고, 반 아이들 모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꿇린 모습을 보인다면, 앞으로 계속 밟힐 것 같았다.


덩치가 집채만 하던 그 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손에 있던 두꺼운 바인더 모서리로 그 아이의 배를 찌르듯 밀치며 말했다, "Move." 그 아이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두 손을 들고 순순히 자리를 비켜섰고, 그의 친구들은 그를 모자란 놈 보듯이 웃었다. 심장이 방망이질 쳐댔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간신히 내 자리에 가서 앉자, 옆줄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가 (그 아이도 늘 혼자였다) 나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건너편 줄에 앉아 있던 남자아이 (나중에 친구가 된 Chris Hammer라는 아이였는데, 후에 학교 미식축구팀 캡틴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 아이가 소위 말하는 "짱"이었다)도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순순히 비켜주지? 그 검은 티셔츠의 친구들이 나에게 달려들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 의아했다. 그 이후부터는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조금 덜 몸에 힘을 줘도 되었고, 자주 웃어 보여도 돌아오는 미소들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다급히 불렀던 그분의 이름은 늘 나와 함께 계셨다.





두 번째 기억은 학교 화장실에서 혼자 점심을 먹던 일이다. 물론 friendly 한 미국 친구들은 기다란 런치 테이블에 같이 앉자고 자리를 내어 주었다. 대부분의 점심을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먹었다. 하지만 때로는, 밥만큼은 긴장하지 않고 먹고 싶어서. 영어로 생각하지 않고, 못 알아듣는 농담들을 알아듣는척하며 웃고 싶지 않아서, 화장실로 피난을 갔다. 짜고 퍽퍽했던 프렛츨을 하나 사들고. 아무 생각도,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는 그 몇 분의 시간은 내 숨통을 틔게 해 주었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후에 하버드 교육대학원에서 조세핀 김 교수님의 <Issues of Diversity in Cross-Cultural Counseling and Advocacy>란 세미나 수업을 들을 때였는데, 수업 중에 짧은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한국에서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온 초등학교 남자아이의 하루에 대한 단편물이었다. 그 아이는 아침 일찍 부모님이 일을 나가시면, 혼자 스팸이랑 계란 프라이로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런치 백에 넣고 학교를 갔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것을 혼자 벤치에 앉아 지켜본 후, 점심시간에는 학교 화장실 변기통 위에 앉아 아침에 싸온 식은 샌드위치를 구겨 넣듯 먹었다. 그 장면을 보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나의 치부를 들킨 것만 같아 혼자 얼굴이 벌게졌던 기억이 난다.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려 안간힘을 썼다. 나는 그때 이미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성공한 이민자로, 예쁜 아이를 가진 엄마로, 부족함 없어 보이는 환경에서 사는 삼십 대 중반의 "괜찮은" 어른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직도 변기통에 쭈그리고서 마른 빵을 삼키고 있는 아이가 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잊고 있던 나의 모습을 관객의 입장에서 갑작스레 데자뷰처럼 마주한다는 건, 어느 면에 있어서는 생각지도 못한 치유의 순간이었다. 저렇게 아팠겠구나. 저런 마음이었구나. 그래도 참 잘 견디었다. 참 감사하다. 몰래 화장실에서 밥을 먹던 아이가 20년이 지난 후 <하버드>라는 청함이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그때의 기억을 앞에 두고, "그때도 지금도 나는 항상 너와 함께란다"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것은 혹시나 아직도 아파하고 있을지 모르는 열여섯의 나를 향한 아버지의 따뜻한 배려였다.




사실 미국에 처음 와서 큰 백인 남자아이가 나에게 시비를 건다 한들 꿋꿋이 대항할 수 있고, 화장실에서 혼자 밥을 먹어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미국에 오기 직전, 하나님은 내 마음에 엄청난 내공을 쌓을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은 한국에서 중학교 3학년 1학기 때 몇 달 동안 왕따를 당한 일이다. 유치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한 동네에서 줄곧 자라 늘 친구가 많았다. 항상 함께 몰려다니던 친구들이 있었고, 학교는 나에게 늘 자신감을 주며 내가 날아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한 순간에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빠가 미국에 이민 수속을 하시러 먼저 떠나시고, 홀로 가장이 되신 엄마의 사업이 급속도로 어려워졌다. 열다섯의 나이. 그야말로 중2병이 도지려고 할 때, 여러 사람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시는 엄마를 보며 사춘기를 겪을 여유도 없이 훌쩍 철이 들어버렸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반에서 성적이 딱 중간치기였는데 (심지어 수학은 "가"도 한번 맞았다), 매일 거의 스무 시간씩 공부를 했다. 밥을 먹을 때도, 걸어갈 때도, 화장실에서도,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때와 비교해봐도, 오히려 중학교 때 공부를 제일 많이 한 거 같다. 중학교 2학년이 끝난 후 봄방학 때 2박 3일 교회 수련회에 가서, 추운 바닥에 꿇어앉아 뭔지도 모를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하나님한테 매달렸다. 하나님은 그때 처음 인격적으로 날 만나주셨다. 근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을 만나자마자 고난이 시작되었다. 중3이 되면서 내 친구들은 모두 다른 반이 되고 나만 떨어져 나오게 되었는데, 마침 공부에만 집중하겠다고 새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 않았더니 어느 순간 그 당시 열병처럼 퍼지던 "왕따"(왕따라는 단어 자체가 처음 생겼을 때다)가 되어버렸다. 그 어린아이가 마음이 죽을 만큼 외롭고 가난해서 녹아내리니, 그 허전한 구멍으로 말씀이 쏙쏙 들어왔다. 아니, 말씀이 막 살아 움직였다. 말씀 붙잡고 기도하고 공부하며, 중3이 끝날 때 마지막 기말고사에서는 여학생 중 전교 수석으로 마칠 수 있었다.


사실 그 왕따라는 것도 세 달 정도밖에 가지 않았고, 곧 반에서 다시 친구들이 생겼다. 그때 내게 다가와준 친구들이 너무 귀했다. 나를 왕따 시켰던 주동자는 오히려 다음 왕따가 되기도 했다. 철저히 외로웠던 그 세 달의 시간 동안, 하나님은 내게 미국에 유학 가서 겪게 될 지독한 외로움을 미리 대비시키시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공부하는 법을 훈련시키셨다. 미국에 와서 처음에 친구가 없어서 외로웠어도, '한국에서 한국말할 때도 친구 없을 때가 있었는데, 미국에서는 미국 말 못 하니까 친구 없는 게 당연하지. 지금이 훨씬 나아. 친구들도 나에 대해 알게 된다면 다가와 줄 거야.'하고 단단한 마음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돌아보면, 하나님은 정말 한치의 오차도 없으셔서 늘 때에 맞는 광야를 준비해 놓으셨다. 그 광야에서 그분을 만나고 예배를 배운다. 이후의 미국 고등학교 시절의 경험들은 계속해서 내 삶 가운데 도전과 성장의 화수분이 되었다.





나는 지금 "하버드는 어떻게 갔나"라는 주제의 글을 연재하면서, 왜 이렇게 치열했던 기억들만을 줄줄이 나열하는 것일까. 쓰리고 아팠던 그 모든 순간들은 하나님이 나를 그분의 테이블로 청해 주신 찬란한 초대장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서 위협을 느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밥을 먹어야 할 때도, 익숙한 곳에서 왕따를 당해도. "그렇게 고생고생을 해서 결국 좋은 학교에 갔다더라~"가 해피 엔딩이 아닌, 그 여정 가운데 발견하는 내 정체성과, 여전히 동행해주시는 그 분과의 발걸음이 해피 비기닝임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그 시작의 연장선상에 있다.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이 시즌도, "작가"라는 이름조차 부끄러운 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새로운 광야에서 다시 부르게 하시는 새 노래임을 믿는다.




당신의 삶에 유보되고 있는 초대장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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