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학생회장 선거에나간 한국인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지금 미국에서는 <미나리>라는 영화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전 세계 영화제 비평가협회, 선댄스 영화제등을 휩쓸며 많은 호평을 받고 있다. 미국에 아칸소라는 백인 시골마을에 정착한 한국인 이민가정의 이야기인데, 나로서는 너무 보고 싶지만 사실 볼 엄두가 안나는 영화다.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라는 대사에서 벌써 마음이 움푹 저린다. 미나리는 '첫해에는 죽고 두 번째 해부터는 수확할 수 있는 식물'이라니, 이민 첫 세대의 희생과 죽음으로 인해 자녀세대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그 비유가 나로 하여금 보고 싶지만 차마 볼 수 없는, 보지 않았지만 이미 본 것 같은, 그런 영화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민 생활은 <미나리>의 그것과는 상황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이곳에서 뿌리내려야 한다. 이곳에서 무언가를 이룩해야 한다"라는 이민 1세대의 절박한 희망의 몸부림에서는 많은 것들이 닮아 있다. 열여섯 살에 이민 온 나는 이민 1세대라고 해야 할지, 2세대라고 해야 할지 좀 애매하다 (technically 1.5세라고 해야 맞겠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실질적으로 미국 사회에 적응하여 뿌리를 내리고 계속해서 살고 있는 것은 나의 가정이기에 (남편도 마찬가지), 나에게는 이민 1세대로써의 정서가 더 깊이 와 닿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은 나의 이민 1세대로써의 미국 고등학교 생활중, 가장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던 계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잔뜩 긴장한 몸과 들리지 않는 영어로 마음고생을 했던 9학년을 마무리하며 여름방학을 앞두었을 즈음, Yearbook이라는 게 배포되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졸업앨범인데, 졸업생들만 받는 것이 아니라 전교생이 다 받았다. 매 학년마다 사진을 찍고, 맨 뒷장 빈 페이지에는 친구들끼리 여름 잘 보내라는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다음 해를 기약했다. 다른 학교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우리 학교만의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졸업하는 12학년들의 사진 옆에는 그 학생의 학교 내외 경력, 활동, 수상내역, 취미, 남기고픈 한마디 등등이 이력서처럼 붙는 것이었다. 선배들의 사진과 내역들을 유심히 읽어내리던 나는, 망망대해에서 마침내 푯대를 발견한 표류자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영어를 빨리 배워서 그저 살아남는 것이 막연한 목표이던 나에게, 야망이 생긴 것이다! 12학년 때 나의 졸업앨범 사진 옆에는 어떤 이력들을 붙이고 싶은지, 그 목표들을 이루려면 거꾸로 계산해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reverse engineering 이 시작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커네티컷의 시골 공립학교에는 나 같은 무명의 어린애를 끌어줄 쓰앵님도, 학원이나 그 어떤 프로그램도 없었을뿐더러, 안타깝게도 영어나 미국 공교육에 전혀 경험이 없으신 부모님께 의지할 수도 없었다. 졸업앨범에 나온 선배들의 이력서, 그것만이 나의 지도이자 나침반이었다.
찬찬히 훑어보니, 소위 "잘 나가는" 선배들의 대부분은 일단 운동팀에 속해 있었다. 역시 미국에서는 운동을 못하면 안 된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했다. 그것은 나에게는 비극적인 소식이었다. 지금 미국에서 내 아이를 키워보니, 보통 이곳의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수영 같은 경우는 생후 6개월부터도) 운동을 시작한다. 여러 가지 종목의 운동을 섭렵하고, 초등학교 3-4학년부터는 두각을 나타내는 한 종목을 정해서 빡세게 한다. 특히 대학을 갈 때 운동을 특출 나게 잘하면 가산점이 붙기도 하고, 리더십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또 장학금의 기회도 열리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한두 개 정도는 잘하는 운동이 있다. 꼭 대학을 위해서가 아니래도, 친구를 사귀고 팀워크를 배우고 좋은 스포츠맨십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운동은 거의 필수다.
하지만 나는 뭐란 말인가. 한국에서 중3까지 다닌 나는, 운동이라고는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해본 적이 없는 이유는 무슨 운동이든지 너무 못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달리기 시합을 하면 8명 중에는 7등, 5명 중에는 4등. 어떻게든 꼴찌만 면하자-가 내 목표였다. 수영을 배우러 가서는 물속에 코를 집어넣는데만 몇 주가 걸렸고, 체력장은 나에게 제삿날과도 같았다. 그런 내가. 평생을 운동하며 네피림처럼 날아다니는 건장한 미국 아이들 사이에서 운동팀에 들어가야 한다니. 문자 그대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는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10학년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모든 운동팀들의 try out 날이 있었다. 팀에 들어갈 수 있는지 평가받는 날이다. 처음에는 배구부에 들어갔다. 모든 애들이 왜 이렇게 바비인형처럼 길쭉길쭉하고 예쁜지. 한국중학교에서 부직포로 만든 상하위 초록색의 체육복을 입고 다니던 내가, 온몸이 쫙 달라붙는 탱크톱에 핫팬츠만 입고, 모델 같은 기럭지로 스파이크를 쫘악 쫘악 날리는 그녀들 사이에서, 정말 여기서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달리기는 왜 이렇게 느린지, 혼자만 벌칙을 담당하기 일쑤였다.
다음은 테니스부 심사. 평생 테니스 라켓이라고는 잡아본 적이 없는 내가,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공을 맞출 리 만무했다. 테니스야 말로 미국애들이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는 운동 중 하나라 그런지, 웬만한 애들은 이미 선수급이었다. 여기 있다간 볼만 주워주다가 끝날 거 같았다.
그다음은 아무 스킬도 필요 없(어 보이)는 track and field. 육상부다. 아... 지금 쓰고도 미쳤던 거 같다. 세상에서 뛰는걸 제일 못하는 애가 육상부라니. 야생마같이 뛰고도 지칠 줄 모르는 육상부원들 사이에서 벌게진 얼굴로 숨만 헐떡이다 한쪽 구석에 쭈그려져 있는 불쌍한 인생이 따로 없었다.
일주일 내내 온몸이 쑤신... 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땅이 입을 벌려 나를 삼키는 것 같은 근육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며 생각했다. 지금 와서 못하는 걸 잘하게 될 순 없다. 내가 조금이라도 잘할 수 있는걸 진짜 잘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운동에 대한 미련을 싹 버리고 책상에 앉았다. 지금 당장은 영어가 힘들지만, 읽고 쓰기는 좋아하니 노력하면 향상될 여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다 하는 것 말고, 무조건 나만의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이력서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나의 성향과 원하는 목표를 정한 후, 정말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무조건 할 거라고 믿고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목표 설정을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스토리텔링을 했는지는 다음 연재 글에 자세히 적을 예정이다), 그중에 가장 야심 찬 목표는 바로 이 두 가지였다.
'나는 학교 신문사 편집장이 될 거야.'
'나는 학생회장이 될 거야.'
화장실에서 밥을 먹던 조용한 동양 여자아이가 학생회장이라니. 된다면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난다면, 내가 운동을 해서 Varsity (학교 대표팀) 주장이 되는 것보다 학생회장이 되는 쪽이 더 승산이 있었다. 또, 리더십을 나타내는 게 목표라면, 이만한 게 없었다. 어차피 난 잃을 게 없었고,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뭘 해도 미친 짓인데, 제대로 미쳐보자 싶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고, 내 계획을 누군가와 상의할 수도 없다고 느꼈다. 그 당시에는 그랬다. 늘 혼자라고 느꼈기 때문에, 붙잡을 건 말씀밖에 없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긴 한데.. 솔직히 될까요? 저 이거 해도 되는 건지 싸인을 좀 주세요." 학생회장 선거 출마 선언 마감일을 앞두고, 두려움과 담대함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마음을 가지고 매일 아침 말씀을 폈다. 고민하던 며칠 내내 나왔던 QT 본문은 처음 읽어보는 <사사기>라는 책이었고 때마침 "기드온"이라는 용사의 이야기를 읽을 차례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너는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리라."
(사사기 6:12-16)
출마 선언 마감일 당일 새벽에 읽은 QT 말씀의 본문이었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새벽이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나같이 작은 아이의 기도와, 고민과, 몸부림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는 말씀이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너는 큰 용사야.'라고 말씀하시는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렸다. 기드온의 심정으로 '제가 어떻게 해요. 저는 학교에서도 제일 작고요, 영어도 못하고요, 친구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반드시 너와 함께 할 거야.'
이제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략이 필요했다. 학생회장 선거는 두 가지 카테고리가 있었다. 하나는 Class President. 그야말로 학생회장이고, 딱 한 명 뽑는다. 이 자리는 오랫동안 축적된 인기와 받쳐줄 그룹이 필요했다. 부모님이 학교에 깊이 관여해야 함은 물론, 학교의 얼굴을 대표하기 때문에, 내가 넘볼 자리가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Student Council이라는 자리다. 한국어로 하자면 학생회 임원인데, 4명을 뽑았다. Class President 가 학교를 대표하는 얼굴이라면, Student Council 은 실제적인 학교 이벤트들과 결정들을 내리는 그룹이었다. Student Council 4명을 뽑는데 8명이 지원했다. 노려볼만했다.
모든 십 대들이 있는 곳이 그러하겠지만, 미국 고등학교에도 아이들 사이에 드라마와 암투가 있다. 학생회장 선거에 나올 정도의 아이들이면 인지도도 높고,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캐릭터가 분명한 아이들에게는 보통 팬그룹이 있거나 enemy, 적대적인 그룹이 있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튀는 후보를 아주 좋아하거나 아주 싫어할 확률이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같이 다크호스 후보인 경우에는, 존재감 자체가 없는 아이이면서도, 또 백인학교에 혼자서만 동양인이기 때문에 좀 눈에 띄기도 했다. 하나의 큰 장점은, 아무도 나를 몰랐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크게 좋아하거나 크게 싫어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런 경우, 보통 크게 싫어하는 아이를 뽑느니, 그냥 모르는 애를 뽑는다. 마치, 야당과 여당, 둘 다 너무 싫을 경우 그냥 존재감 없는 무소속을 뽑는 이치와 같다.
그 틈을 노리며, 출사표를 던진 다음날부터 연설문을 열심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학교 영어 선생님을 찾아가 연설문을 몇 번씩 수정하며 발음도 교정받고 거울을 보며 연습했다. 선거날 당일, 전교생 앞에 나가서 마이크를 들고, 뜨거운 무대조명을 받으며 천천히 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다. 중간중간 청중들과 눈을 마주치는 제스처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연설문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후보들의 연설은 아이들을 웃겨주면서 빵빵 텨졌던거 같은데, 나의 연설문은 뭔가 굉장히 비장한 내용이었다는 느낌만이 남아있다. 너무나 긴장을 해서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연설문의 디테일들은 생각이 잘 안 난다. 방망이질 쳐대는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올까 봐 심호흡을 하며, 기드온에게 하셨던 말씀을 되뇌며 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던 그 몇 분의 공기만이 뚜렷이 가슴속에 남아있다.
아무도 나를 기대하지 않았다. 나도 나를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말씀이 떨어졌고, 그 말씀을 붙잡고 가서 그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이 못내 자랑스러울 뿐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교장선생님이 나를 오피스로 부르셨다. 내가 4명 중 한 명으로 당선되었다고 하셨다. 그 날 이후로 나의 학교 생활은 크게 쉬워졌다. 물론 친구들도 더 내게 다가와주었다 (내가 당선이 되어서 그랬다기보다, 나라는 애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이제는 전교생이 아는 애가 되어서 그랬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내 안에 있었다. 견고한 방어기제로 툭하면 화장실로 숨어 들어가기 바쁘던 아이가, 이제는 숨을 쉬고 마음을 열고, 자신 있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이다.
10학년 때 처음 Student Council에 당선이 된 후, 11학년, 12학년 때도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섬길 수 있었다. 9학년 때는 영어에 자신이 없어서 한 번도 손 들고 발표를 하지 못했었는데, 당선이 된 이후로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달 일주일씩 아침 교내방송을 맡아서 하기도 했다. 바위틈에 숨어 "제가 저희 집에서 제일 작다니까요"라고 소심히 말하는 기드온에게 가장 큰 적은 미디안 족속이 아닌, 그 안에 뿌리내린 두려움과 어그러진 정체성이었을 테다. "내가 뭐라고 저걸 하겠어. 나는 살아남기만 해도 다행이지." 기드온 보다도 더 찌질하고 소심하고 두려움에 온몸을 떨던 나에게 하나님은 "큰 용사여"라고 부르시고, "살아남지만 말고 가서 승리하며 살아. 넌 내 딸이잖아!"라고 말씀하셨다.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내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 다림줄이 되어준다.
https://brunch.co.kr/@glolee/15
여전히 나는 미국 백인 동네의 소수인종으로 살며, 이곳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며칠 동안 이 글을 쓰려고 붙들고 있는데, 어제 한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선생님과 학부모의 연합인 Parent Teacher Organization (PTO)라는 게 있는데, 공교육 시스템 내에서는 큰 영향력을 가진 단체 중 하나이다. 여러 중요한 결정들이 PTO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래서 꽤 많은 권한을 갖는다. 그 PTO의 Board Member로 누가 날 추천했는데, Join 하겠느냐는 의사를 물은 이메일이었다. 20년 전 선거날의 기억이 밀려오는 메시지였다. 성인이 된 후로 나의 자세는 이러했다: '최대한 튀지 말고 조용히 살자.' 특히나 지난 몇 년 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에 살면서 전에 겪어 보지 못한 인종차별이 팽배해지니 더더욱 몸을 사리게 됐다. 안 그래도 조용하고 체제 순응적인 동양인으로 살면서, '나서지 말고 살자. 편한 사람들만 만나고 살자. 안 그래도 영어는 평생 어려운데 뭘 또 하니' 싶은 마음에 이메일을 읽자마자 '음, 당연히 안 하지.'라는 답장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또 익숙한 음성이 들린다.
"살아남지만 말고 용사로 살아."
영어가 익숙지 않는 동양학생이라고 해서 계속 화장실에 숨어 있으라는 법이 없었듯, 주류가 아닌 소수인종이라고 해서 의견을 낼 수 없고 늘 다수에 편승해서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힘으로 할 때, 우리는 아웃사이더(outsider)가 아니라 아웃라이어(outlier)가 된다.
아웃라이어의 뜻은 이렇다.
1. 본체에서 분리되거나 따로 분류되는 물건.
2. 표본 중 다른 대상들과는 구분되는 통계적 관측치.
요즘에는 아웃라이어가 "특출 난 사람" 또는 "집단에서 벗어나 성공한 사람"과도 혼용해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아웃라이어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구별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편하지만 계속 분리되어 나오는 것. 처음에는 성공하고 싶어서, 주류에 속하고 싶어서 발버둥 친 아웃사이더의 몸부림으로 시작했을지언정, 결국에는 나만의 독특한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사람 말이다.
나는 아직도 아웃사이더의 마인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여전히 아웃사이더의 옷이 편하다.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I'll take the position."이라는 이메일 답장을 보낸 순간, 내 안전지대를 벗어난 아웃라이어의 삶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기를 소망한다.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곳에서 용사로, 아웃라이어로 살아가야 할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다.
이번 주말에는 용기를 내어, 아이들과 함께 영화 <미나리>를 볼 작정이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해서. 내가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기 위해서.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란다'지만, 무엇으로 잘 자라야 하는지, 어떤 열매를 맺으며 잘 자라야 하는지, 그 자라는 힘은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보기 위해서.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할 시간이 기대된다.
• Soli Deo Glor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