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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Apr 11. 2021

엄마, 누가 우리를 미워해?

애틀랜타 총기사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백인이 되고 싶었던 나

어디든 속하고 싶은 나이, 열여섯 살에 미국의 커네티컷이라는 주의 시골 마을로 이민을 왔다. 학생수가 2000명이 넘는 공립고등학교에 한국인은 나와 내 동생밖에 없었고, 아시안 학생들을 다 합쳐도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인종의 다양성 (racial diversity)이 적은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수학은 잘하고 운동은 못하며 눈은 옆으로 짝 찢어진 조용하고 전형적인 아시안 학생은 되고 싶지 않았다. 겉모습이라도 얼른 동화가 되고 싶어서, 이곳의 아이들은 무슨 옷을 입고 다니는지 유심히 관찰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H.O.T. 와 듀스, 업타운, 디바 같은 그룹들이 활동하며 힙합바지로 온 동네를 열심히 쓸고 다니던 시절이라, 나에게는 통 큰 바지와 커다란 신발들 밖에 없었는데 이곳의 아이들은 (허벅지는 쫙 붙고 다리 아래로 내려갈수록 살짝 퍼진) 부츠컷을 최대한 내려 입고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영향인지) 골반뼈를 한껏 내놓고 다녔다. 목에는 동아줄을 꼬아 만든 것 같은 choker를 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하나같이 Abercrombie & Fitch라고 쓰여 있었다. 옳구나, 나도 저기 옷을 사 입어야겠다 싶었다. 동생과 그 스토어를 처음 들어섰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스토어 입구에는 잡지에서 방금이라도 튀어나온 듯한 금발의 남자 모델과 쭉쭉빵빵한 여자 모델이 비비인형처럼 서서 하얀 치아를 웃어 보이며 맞아 주었다. 진한 향수 냄새가 진동하던 안에는 그렇게 바비인형들처럼 생긴 직원들이 돌아다녔고 힙 한 음악이 쿵쿵 울렸다. 동생과 나는 들어와 있으면 안 되는 곳에 들어온듯해 어깨가 움츠러들다가도, 그래도 왠지 여기 있으면 쿨한 "아메리칸"이 된 것도 같아 기분이 묘했다. 야심 차게 고른 몇 벌의 옷 가지 들을 들고 피팅룸에 들어갔다. 하나같이 팔은 강시처럼 길었고, 다리도 자라다 말았는지 맞는 바지가 없었다. 다른 행성에 사는 이들의 옷을 억지로 끼워 맞춰 놓은 것처럼 어색한 우리의 모습을 거울로 바라보며, '와.. 진짜 못생겼다..' 고 생각했다.

 

길이 수선을 할 필요가 없는 반팔, 반바지의 Abercrombie & Fitch 옷을 어떻게든 맞춰 입고, 긴 생머리에 고데기를 한 후 왁스를 발라 구불구불하게 만들고 백인 친구들하고 몰려다니면, 나도 백인까지는 아니더라도 "Off-white"은 될 거라고 생각했다. (Off-white 이란, 완전 흰색까지는 아니지만, 흰색에 노르스름한 틴트가 덧입혀진 색을 말한다). 한 번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고, 나는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당당히 말하곤 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면 빨리 주류에 편승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소속감이 전부였던 사춘기 시절의 이야기다. 최대한 "그들"과 비슷해 보이며, 그 사이에서 공부도 잘하고, 모범적이고, 주류사회에 잘 적응한, "성공한 이민자"의 표본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이민 1세대 분들은 공감해주실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사회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집에서 아이들과 영어만 쓴 탓에, 어른이 된 자녀들과는 더 이상 한국말로 소통이 불가능한 가정들. 어떻게든 트러블은 피해야 하고, 큰소리 나는 것은 볼성 사납다는 지극히 동양적 마인드에 그냥 '내가 손해보고 말지' 하고 넘어가버리는 그런 소극적인 마음들을 말이다.


아시안들은 "Model Minority, " 즉 "모범적 소수"라고 불린다.

아시안들이 성실하게 일을 하고, 또 교육 수준도 높아 윤택하고 사회적으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다른 소수계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회 구성원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용어다. 아시안을 일견 추켜세우는 듯한 이런 전형화는 실상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또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모든 아시안을 '성공한 모범적인 소수'라는 하나의 고정된 틀에 넣음으로써 실제로 아시안이 맞닥뜨리는 수많은 차별과 어려움을 은폐하는데 크게 일조하기 때문이다. 아시안은 다른 소수 인종의 '모범'이니만큼 항상 주류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고, 바람직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며, 또 상대적으로 '인종차별 같은 건 격지 않기'때문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 역시 서구사회나 같은 아시안 커뮤니티에 의해서 꾸준히 축소되고 숨겨진다.

<실질적인 위험과 모델 마이너리티 신화> 글 by 파도


이렇듯 모범적으로 살아야 하는 인종이라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 휘말리지 않고 피해 가는 게 상책이라는 수동성이 우리 안에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고, 차라리 Off-white 인척 하는 것이 편해서 그런지 몰라도, 흑인들의 Black Lives Matter 운동이나 다른 소수계층만큼 결집력 있는 파워를 갖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몇 년 전에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보스턴 시내를 운전하고 있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정차해 있었는데, 길 옆 도보를 걷던 20대 중반쯤의 백인 남자들 몇 명이 우리 차 문을 고의적으로 아주 세게 두들기고 낄낄 웃으면서 뭐라고 욕을 하며 도망갔다. 뒷좌석에는 어린아이들이 앉아 있었고, 두들기는 소리가 너무 컸어서, 순간 차 안의 우리 모두는 얼어버렸다. 차의 창문이 열려 있었는데, 창문 안으로 무언가를 던지거나 갑자기 문을 열었으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은 남편은 열린 창문 밖으로 그 남자들에게 "Stop right there!"라고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쫓아가고 있었다. 옆에 있던 나는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서 "애들도 있는데 그냥 참아! 빨리 문 닫아! 빨리 가자!"라며, 맞짱 뜰 각오로 쫓아가는 남편을 온 힘을 다해 말렸다. 일단 일이 커지는 게 무섭고, 괜히 말려들었다간 우리 가족 전체가 위험해진다는 생각에 무조건 도망가고만 싶었다. '우리만 참으면 되지. 일 크게 만들지 마.'라고 생각하면서.


차를 돌려 출발하면서, 부끄러웠다. 피해를 당해도 왜 나도 모르게 참게 되는지, 아이들이 뒤에서 이 모습을 어떻게 봤을지, 그렇다고 싸우자고 쫓아가는 남편을 그냥 뒀어야 했을지, 혼란스러웠다.



애틀랜타 총기 사건

지난 3월 16일, 애틀랜타의 한인 밀집지역에서는 아시안들이 운영하는 스파 업소 3 군대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사망자 8명 중 4명이 한국인, 2명이 중국계 미국인이었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군 보안관은 용의자에 대해 "He had a bad day" 라며 그저 좋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던 성중독자의 범행이라는 발언을 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아시아 혐오 범죄인 가능성이 농후한데도, 그저 일반 범죄로 포장하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이제까지 아시안 커뮤니티들이 얼마나 차별과 혐오범죄에 소극적이었는지 각성과 반성을 요구하는 소리들이 일어났다.


여러 토론들에 참여하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개인차이가 있겠지만) 성인이 돼서 미국에 온 사람들과 미국에서 나고 자란 교포들의 반응이 다른 패턴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 민주화 시대를 겪거나 공부하고 성인이 되어 미국에 오신 분들은 한국에서 적어도 인종 때문에 차별을 겪어 본 적이 없으시므로 이런 사회적 차별을 겪을 때 "아니, 이것들은 뭐지? 왜 가만히 있어? 싸워야지!"라는 반응들을 보이셨다. 반면,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어렸을 때부터 자라온 교포들은 안타까워는 하지만 생각보다는 소극적인 반응들을 보였다 (물론 모두 그런 건 아니다).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세포 속에 자연스레 자리 잡은 "Model Minority"의 마인드와 먹고살기 바쁘셨던 이민 1세대 부모님들이 적극적으로 차별에 대항하는 모습을 많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그러려니 해.'라는 마음들의 습관적인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나만 해도 그랬다. 우리 차를 치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끝까지 쫓아가려는 남편과 그를 뜯어말리는 나의 모습만 봐도 말이다.




하지만, 이번 애틀랜타 총기사건은 다르게 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어떡해.. 불쌍하다. 안됐다."라며 발만 동동 굴렀지만, 어느 순간, 계속 이렇게 남의 집 불구경하듯 있다가는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닥칠 일이라는 위급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나 트럼프의 미국과 코로나 시대를 살아오며, 아시안이라고 해서 더 이상은 인종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확실한 타깃이 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반듯하게 Off-white 인척 산들, 우리도 결국은 People of color 일 뿐이다. 우리야 그 비극에 적응하면서 산다고 해도,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살게 할 것인가. 언제까지 영원한 이방인 (Perpetual Aliens)으로 소리 죽여 사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모범"을 보여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번만큼은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이 모였다. 우리 모임 안에는 대학교수, 음악가, 미술가도 있었지만 이제 갓난아기를 낳은 지 백일도 안된 엄마도 있었다. 대학생을 둔 엄마도 있었고, 아픈 아이의 엄마도 있었다. 풀타임으로 일하는 엄마도 있었고, 아이들을 키우며 자투리 시간으로 열정을 불태우는 엄마도 있었다. 모두 다 서 있는 곳이 달랐지만, 우리는 모두 엄마였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일단 시작이 중요하다고 느꼈기에 우리가 가진 재능으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며, 유튜브에 올릴 수 있는 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첼리스트는 음악으로, 미술가는 그림으로, 나는 글로, 누군가는 스피치로, 누군가는 리서치로. 모두 각자 처한 상황에서 보물들을 꺼내 놓았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세상과는 어떻게 다른 메시지를 내볼낼것인가 였다. 세상은 #StopAsianHate으로 떠들썩했다. 곳곳마다 그 싸인이 붙었다. "우리를 미워하지 마세요." "아시안을 향한 미움을 멈추세요." 그 취지에는 공감을 했지만 그 싸인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 한구석은 늘 불편했다. 그 슬로건은 이미 피해자의 마음을 깔고 시작하는 목소리였다. "우리는 미움받는 사람이다"라는 믿음을 기정 사실화한 목소리였다. 길을 지나갈 때마다 그 싸인들을 보며 어린 딸은 눈을 크게 뜨고 나에게 물었다. "엄마, 누가 우리를 미워해?? 왜 미워하지??" 누가 자기를 미워할 거라는 것, 특히 아시안이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거라는 것에 대해 아예 상상조차 안 해봤던 딸에게 "응, 넌 이미 피해자야. 몰랐니?"라고 외치는 싸인들이 엄마인 나로서는 불편했다.


사실, 우리 프로젝트 그룹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는 의견과 "사랑?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 우린 싸워야 해. 더 이상 참고 살지 않겠다는 걸 알려 줘야 해!"라는 의견이 갈렸다.


모두 처음 내보는 목소리이기에, 저마다 내는 음정의 높낮이가 다름은 당연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내야 할까? 이미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목청껏 외치고 있는데, 우리가 내야 하는 목소리는 무엇이 달라야 할까?

 


피해자가 아닌 승리자로 부르는 노래

많이 고민하고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답해주셨다.

"This Life-Giver was made visible

and we have seen him.

We testify this truth:

the eternal Life-Giver

lived face-to-face with the Father

and has now dawned upon us.

So we proclaim to you

what we have seen and heard

about this Life-Giver

so that we may share and enjoy

this life together." (1 John 1:2-3)


'우리 목소리에는 오직 생명만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맞대고 본 것 같이,

그 진실만을 말할 것이다.

그 생명이 우리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 생명을 나누고

함께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잠잠하지 않을 테지만, 우리의 목소리는 피해자의 소리가 아닌 승리자의 소리가 될 것이다. 세상이 죽음과 두려움과 미움을 말할 때, 우리는 생명과 사랑과 희망을 말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내 마음속에 한 가지 문장을 넣어 주셨다.

"We proclaim life over death.

Love over hate.

Hope over despair."


"우리는 선포합니다.

죽음을 넘어선 생명을.

미움을 넘어선 사랑을.

절망을 넘어선 희망을."


이 마음을 나눴을 때, 우리 팀원들의 마음은 놀랍게 하나로 모아졌다. 우리는 각자 다른 시작점에 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첫 발자국을 띈다는 게 가장 중요했다. 더 이상 숨어 있지 않고 손을 들 수 있다는 것. 빠른 사람이 느린 사람의 보폭에 발을 맞춰줄 수 있다는 것. 우리 안에 두려움을 이기고 더 큰 것을 함께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뜻깊었다. 마음을 모은 후에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세상은 #StopAsianHate을 외치지만

우리는 #WeAreHereToLove를 외쳤다.


"너희 아시안들,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외침들에 우리는 답한다.

"우린 여기 있을 거야. 앞으로도 계속. 하지만 We are here to love!"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와중에 하나님은 또 하나의 과제를 주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3-24)


하나님은 우리 프로젝트를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 예배로 받으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화해와 용서에 대해 말하면서, 먼저 우리 안에 화해와 용서를 이루지 못한다면, 이 영상은 진정성 있는 열매를 맺지 못할 거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래서 팀원들에게 용기를 내어 제안했다. "우리.. 완성된 영상, 유튜브에 공개하기 전에.. 한번 같이 각자의 삶 속에 용서하지 못했던, 화해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먼저 화해해보면 어떨까요?" 순간 모두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나도 그랬다. 무섭고. 하기 싫었다). 시댁 식구가 생각난다는 분, 올케언니가 생각난다는 분, 소원해진 친구가 생각난다는 분들이 있었다. 나도 내 동생이 생각났다. 하지만, 어쩌면 하나님이 이 영상을 만드시면서 우리에게 정말 선물로 주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 삶 속에 풀어지는 용서와 화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기회였다.


(그리하여 탄생하게 된, 동생과의 화해의 기록. 역시, 내가 가장 큰 수혜자였다).

https://brunch.co.kr/@glolee/31



부활절을 하루 앞둔 토요일, 동생과의 자연스럽고 기뻤던 화해가 이루어지고, 우리의 작은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상 안에 진짜 생명이 담겼다고 믿고 감사했다. 일부러 영상 release 날짜를 그렇게 맞춘 것은 전혀 아닌데, 편집을 하다 보니 영상 배포 날짜가 부활절 주일로 맞춰졌다. 우리의 메시지 "Life over death"를 선포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타이밍은 없었다.


We Are Here To LOVE

https://youtu.be/dUPTZQllYb8 


3분 26초짜리 아주 짧은 영상이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영상과 편집 분야의 전문가들이 아니다. 그야말로 아마추어들의 솜씨이고 내용도 단순하지만, 한 평생 침묵으로 일관하던 사람의 첫 말문이 터지듯 우리의 첫 노래는 이렇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하나님은 우리의 서툰 노래를 아름답게 쓰시고 계신다.


<All Things Considered>라는 NPR 라디오 방송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보스턴 대학에서,

하버드 대학에서,

보스턴 한인 신문에서,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미국 유명 사립고등학교들에서,

관련 주제의 컨퍼런스와 포럼마다 우리의 영상이 틀어지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심지어는 #WeAreHereToLove 캠페인을 전국적인 캠페인으로 만들고 싶다는 제의까지 들어왔다고 하니, 우리의 손을 떠난 이 메시지가 앞으로 어떻게 쓰일지 가늠할 수 없다. 정말... 생명이 있어서 그런 걸까? Hate에 동조하지 않고, 피해자를 자처하지 않고,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승리의 노래를 앞서 부를 때에 그 바람이 현실이 되길 기도해본다.



끊이지 않는 총기사건들과 관련법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 미국의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은 아니다. 인종차별 문제도 마찬가지다. 비단 미국뿐만이 아닌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저마다의 고유하고 해답이 없어 보이는 문제들은 늘 뿌연 안개처럼 우리의 시야를 흐려 놓는다. 가해자와 그를 좌시하는 사회적 구조는 분명 바뀌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을 계속해서 피해자의 시선으로 대하는 이상, 미움과 복수와 심판만이 반복되는 악순환에서 헤어 나오기는 힘들어 보인다. 우리의 시야에서 안개가 걷히고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그 청명한 시선 아닐까. 분노와 미움이 걷히고 평안과 확신으로 모든 일을 분별하게 만드는 청명한 시선 말이다.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어서 아이들을 위해 시작했던 작은 시도가, 우리 안에 치유의 시간을 넘어서 사회에도 영향력을 줄 수 있다니. 떨림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마음에도 용기의 싹이 자라난다.



• Soli Deo Gl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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