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승 Apr 04. 2021

내가 돌아와도, 맨발로 달려 나와주실 건가요?

돌아온 탕자와 돌아오지 못하는 그의 형 이야기


오늘은 부활절 주일, Easter Sunday이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셨는데, 나에게는 4년 전 부활절부터 생명에 이르지 못하고 아직 죽음에 머무르고 있는 부분이 있다. 동생과의 관계가 그것이다.


4년 전, 개인적인 일로 동생이 미국의 우리 집에 두 달 정도 머무르게 되었다. 자세히 나누기에는 너무나 긴 스토리지만, 결론적으로는 딱 부활절 날 아침. 오랜 시간 동안 압력밥솥처럼 쌓여오던 텐션이 정말 별것 아닌 일로 터지면서, 역대급 싸움을 하게 되었다. 둘 다 서른이 훌쩍 넘고, 심지어 나는 아이들 엄마인데도, 둘 다 미친 애들처럼 싸웠다. 나는 동생 하고만 있으면 눌러지는 <상실감>이라는 버튼이, 동생은 나와 있으면 눌러지는 그 아이만의 버튼이 한꺼번에 눌러져,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당시 만 5살이던 우리 첫째는, 생전 처음 보는 엄마와 이모의 괴물 같은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고, 18개월이던 우리 둘째는 제 딴에는 엄마를 보호해 준답시고 침대에서 급하게 내려오다가 굴러 떨어져서 맨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굳은 표정의 남편은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그렇게 더 싸우다가 부활절 예배는커녕, 결국 동생은 짐을 싸서 아예 집을 나가버렸다.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버린 자리, 동생이 가방을 끌고 나가버린 그 집 안에서 나는 버려진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부활절이라고 사다 놓은 백합에서 좋은 향이 났다. 창문에서는 봄을 알리는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향기 좋은 몰약을 바른 시체처럼 널부려져 있었다. 영혼도 빠져나간 거 같고 껍데기만 남은 거 같은데, 왜 꼬륵꼬륵 배는 고픈지.. 배고픔을 느낀다는 게 참 짐승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오후 늦게 되어서 근처 호텔에 체크인한 동생을 데리러 갔고, 우리는 이내 화해를 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잘 지냈다. 매년 여름마다 한국에 가면 동생과 함께 지냈고, 동생이 조카들을 임신했을 때 서프라이즈 베이비샤워를 해주기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동산도 함께 가고, 많은 평범한 것들을 함께 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여전히 많은 부분이 매여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둘이서만은 무엇을 하지 않는다. 가족 카톡방에서 안부를 묻고 간간히 아이들의 사진들을 전송하기도 하지만, 전화를 해서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아주 드물다.


4년 전 그 날은, 우리가 묶인 날이다. 그리고 그 묶음은, 그 싸움을 증인 서고 있던 우리 아이들에게까지 전달이 되었다. 그 날 이후로, (나만의 비약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들이 서로에게 부쩍 공격적이 돼었던 건 기분 탓일까..


"너 동생한테 왜 그래"

"엄마도 이모한테 그러잖아."

"......"


만 다섯 살짜리 아이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였던 걸까.




나와 네 살 터울이 지는 동생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첫 기억이 있다. 동생의 돌 잔칫날이었다. 동생은 색동저고리 한복을 입고 벽에 기대어 바나나를 오물오물 먹고 있고, 나는 그 옆에 벨벳 원피스를 입고 서서 그 아이를 약간 흘겨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이 났었는지, 왜인지 모르지만 머리에 물을 뚝뚝 흘리면서, 입을 오리처럼 쭈욱 빼밀고서. "저 입 봐라, 입. 입에 옷걸이 걸어도 되겠네~" 누군가 했던 말도 기억난다.


엄마가 지금까지도 나에게 종종 하시는 말씀이 있다. "너는 4살 때까지는 아주 천사가 따로 없었는데, 4살 이후부터 웬일인지 이상해졌어~ 보는 사람마다 꼬집고 다니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웃자고 하는 얘기였지만, 그때마다 난 속으로 되물었다. '웬일인지 정말 모르는 거예요? 4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보세요. 동생이 태어났잖아요.'


도대체 왜 동생과 관련된 일만 생기면 내 안에서 뭔가가 똬리를 틀듯이 불편한 걸까 고민하며, 그 감정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하나님한테 보여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다. 그때, 근 30년 동안 완전히 잊고 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내가 유치원 다닐 때였던  같으니, 아마 나는 5-6, 동생은 1-2 정도였던  같다.  당시 우리  사정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느낌은 있다. 유치원을 갔다 왔는데, 엄마는 동생에게 '슈퍼 100'이라는 떠먹는 요거트를 먹이고 있었다. 초록 뚜껑을 벗겨 먹는 야쿠르트 밖에 모르다가, 딸기 향이 솔솔 나는 떠먹는 요거트라니, 너무 맛있어 보이는 거다. 하지만 매일 하나밖에 배달이  와서 동생이 먹고 있는 지금 이것밖에 없다고 했다. " 요거트  먹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오후 따뜻한 햇살 속 거실에서, 엄마는 플라스틱 스푼으로 몽글몽글 달콤한 요거트를 동생에게 떠먹이고, 동생은 그걸 홀짝홀짝 잘 받아먹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동생의 입 주변을 닦아주며 "옳~지, 오~옳지, 잘 먹네" 하며 웃었다. 나는 불 꺼진 부엌 식탁에 홀로 앉아 하염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내 것까지 하루에 두 개 배달 오게 하면 안 되냐고 물어보면 너무 비쌀 거 같아 왠지 그러면 안될 거 같았다.



30년 넘게 잊어버렸던 그 장면이 왜 갑자기 기억나는지, 나는 한참을 울었다. 그때였던 걸까. 어린 내 안에 상실의 마음, 고아의 마음이 들어왔던 것이. '여기 내가 먹을 건 없구나. 근데 비싸니까 달라고 하면 안 돼. 하나 있는 건 동생 거랬어..' 그때부터였을까. 내 밥그릇, 내 영역에 대한 집착이 강하여졌던 것이. 누군가 허락 없이 내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것이 극도로 싫었고, 내 마음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무조건 "언니니까" 나눠줘야 하고, 해줘야 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유 없이 화가 났던 것이.


사실 이 모든 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엄마는 첫째라고 항상 나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셨다. 좋은 것도 나 먼저, 밀어주는 것도 나를 더 많이. 엄마에게 나는 목숨 같은 딸이기 때문에, 엄마는 나를 더 챙겨주면 챙겨주었지 동생보다 뒷전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일단 내 안에 자리를 잡은 고아의 마음은, 나에게 한평생 거짓말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내가 중3, 동생이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엄마는 우리 둘을 미국에 계시던 아빠에게 보내셨다. 아빠는 미국에 먼저 가셔서 이민 수속을 밟는 중이셨다. 엄마는 한국에서 사업을 하셔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거꾸로 기러기 가정"이 되었다. (보통은 아빠들이 한국에서 일을 하고, 엄마들이 아이들과 유학/이민을 오니 말이다).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두 딸을 아빠 혼자 키우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버거운 일이었을 테다. 하지만 나로 써도, 미국 학교에 적응하는 것만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 맨날 엄마 보고 싶다고 외로워하고 영어는 ABC도 모르는 상태로 미국에 온 동생의 엄마 역할까지 해야 하는 건, 16살의 나에게는 무거운 마음의 짐이었다. 나에게 동생은 늘 너무 어린애라는 생각이 있어서 그랬는지,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라기보다는 내가 무조건 챙겨서 끌고 나가야 하는 존재였다. 숙제는 다 했는지, 새로운 친구는 좀 사귀었는지, 악기 연습은 제대로 했는지, 방과 후 TV만 보고 있던 건 아닌지.


미국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하루는 동생이 그룹으로 하는 숙제를 하러 미국 친구네 집에 갔었는데 그 친구네 엄마가 차별하는 듯한 발언을 듣고 왔다고 집에 와서야 얘기를 했다. 그 자리에서 한마디도 못하고 왔다는 동생에게도 화가 나고, 동생을 무시한 것 같은 그 아줌마한테도 화가 나고, 내가 이렇게 화가 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엄마 아빠한테도 화가 났다. 안 되는 영어로라도 그 아줌마한테 전화를 걸어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할 말을 A4용지에 한 바닥 적었다. 그냥 전화를 해버리면 분명히 우왕좌왕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다가 더 무시를 당할게 뻔했으므로, 내 딴에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예의 바르게, 하지만 똑바로 할 말을 다 하고 말겠다는 전투적인 자세로 나름의 스피치를 썼다. "Mrs.OO,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건 unfair 합니다. 저희가 여기 온 지 얼마 안돼서 아직 이곳의 문화도 잘 모르는 게 사실이고, 지금은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서 언니인 제가 대신 전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아이에게 상처가 됩니다. 사과해주시면 좋겠어요." 최대한 떨리는 목소리를 자제하며 전화했고, 그 아주머니도 못내 당황했는지 (솔직히 나의 말도 안 되는 스피치를 얼마나 이해하셨을는지도 미지수다) 순순히 미안하다며 암쏘쏘리를 하셨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뭐 그렇겠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지만, 그 당시 내 심정으로는 누구도 우리 가족을 무시하지 못하게 할 거고, 죽으나 사나 이럴 때 나설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특히나 내 동생을 건드린 것만큼은 "까도 내가 까."의 심정이었달까.


피는 물보다 진해서 그런지, 나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어디서든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항상 내가 자진해서 마음을 내기 전에, 엄마는 늘 한발 먼저 연락을 해왔다. "숙제 챙겨주고 원서 쓸 때 도와줘라." "네가 좀 다 알아봐 줘." "네가 같이 좀 가줘라. 걔는 마냥 애기 같잖아." 안 그래도 하려고 했는데.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내 마음 다해 나서 주고 싶었는데, 엄마가 저렇게 먼저 얘기를 해버리면 마음이 확 닫혀 버렸다. 이 때다 싶어 고아의 마음은 나에게 득달같이 말을 걸어왔다. "너 보고서는 혼자 다 하라고 했는데. 네가 도움 필요할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넌 혼잔데. 넌 고아인데. 쟤는 외동딸이다, 그지?"


엄마가 차라리 이렇게 말해줬으면 어땠을까. "너도 힘들지? 동생도 이제 다 컸으니까 한번 혼자 해보라고 두지 뭐. 혹시 나중에 도움 필요하다고 하면 그때 언니가 한번 좀 봐줘." 그러면 내 딴에는 이번 기회에 좋은 언니 노릇 좀 해보자며 "아니야, 걔가 뭘 알아. 내가 해줘야지. 내가 도와줄게 엄마 걱정 마." 그랬을 텐데.. 돌아오는 소리는 "넌 애가 왜 이렇게 예민하니... 언니가 되가지고."였다.



엄마의 한발 이른 부탁에 늘 마음이 상해버린 나는, 마음이 상한 기분이 든다는 거 자체가 스스로 끔찍한 괴물 같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나도 잘해보고 싶은데, 이런 쓴 마음이 온몸에 퍼진다는 게 싫었다. 아무 잘못 없는 동생이 미워 보인다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동생을 때려죽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모두 다 나에게 가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거 같아서.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by Rembrandt. 사진출처: wikiart.org


'아버지 집을 지키며, 그가 하라는 것은 다 하는 말 잘 듣는 아들은 난데. 왜 아버지는 집 나갔다 온 탕자 동생을 위해 소를 잡아 주는 건데? 그 소, 내가 치고 있던 소인데, 그걸 왜 걔를 잡아다 주는데? 나한테는 염소 한 마리 안 잡아 줬잖아. 나 보고는 다 혼자 하라고 했잖아.' 탕자의 형은 생각했을 테다.


탕자는 돌아오면 어쩌면 아버지가 받아 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혹시 아들로 맞아 주지는 않더라도 내쫓지는 않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탕자의 형은 달랐다. 온통 그 신경이 "좋은 상속자"가 되는 것에만 쏠려 있었기에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볼 틈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성실히 일하고 있는데, 맨날 문 밖에 나가 동생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 내 것을 빼앗아 동생을 줘버리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래서 동생이 돌아오고 잔치가 벌어졌을 때, 더는 버틸 수 없어 형은 집을 나가버렸고, 다시 돌아왔는지에 대해 성경은 말해주고 있지 않다. 렘브란트의 페인팅에 보면, 오른쪽의 형은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동생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아버지와 똑같이, 주인이 입는 붉은 옷을 입고 주인의 관을 머리의 쓰고 있다. 이미 충분히 주인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는 한평생 노예의 마음으로 산 것이다.



지난 몇 년을, 내 안의 탕자 형을 마주 할 때마다 숨어버리고 싶었던 나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윤승아, 내 것이 다 네 것이야.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잖아.  


오늘, 네가 결정만 한다면.

네 삶에 진정한 부활이 이르게 될 거야

네 아이들을 묶은 관계의 사슬도 이제 나는 끊을 거야

이 관계의 사슬이 끊김으로 네 집안 전체의 분열됨이 떠나갈 거야."


그리고는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보여주셨다. 동생은 온몸에 멍이 든 채로 울지도 않고 서있었다. 그 옆에는 아직 발라지지 않은 연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꽁꽁 얼은 상태로 얼음처럼 서 있는데, 하나님은 내 뒤에 서서 머리에서부터 따뜻한 목욕물을 붓고 또 부어주셨다. 빨리 가서 동생 연고 발라주라고는 하지 않으시고, 연신 "추웠지"라고 하시며 언 몸을 녹여 주셨다.


그 장면을 보면서도, 선뜻 용서에 대한 마음이 차오르지 않았다. 내가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건지, 용서를 받아야 하는 건지, 누가 누구를 용서하면 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하나님은 다시 정확히 말씀하셨다.

"이번엔 용서가 아니야. 축복이야.

Bless her abundantly and you will be free!

내가 너에게 축복할 수 있는 권세를 주었어.

너는 내 딸이기 때문이야.

더 이상, 빼앗겼다고 속삭이는 덫에 걸리지 마.

네가 온 맘 다해 축복하는 순간 그 덫은 영원히 사라질 거야."



매번 용서하고, 또다시 미워하고, 그 후엔 더 많이 자책하고. 끊임없이 반복되던 비난과 정죄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었는데, 열쇠는 용서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하나님,

동생이 저보다 훨씬 잘 되기를 축복합니다.

동생의 남편이 저희 남편보다 더 잘 되기를 축복해요!

동생의 아이들이 저희 아이들보다 더 많이 잘 되기를 축복해요!!

저 진짜예요. 진짜 진짜로요!"


유치 찬란하기 그지없지만, 늘 상실감에 젖어있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을 소리 내어 선포했다. 나보다 동생이 더 잘 되기를. 내 가정보다 동생의 가정이 더 승하기를. 거짓말에 속아, 어떻게는 내가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강퍅한 마음이 가득했는데, 이렇듯 하나님은 나에게 축복의 권세를 exercise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리고는 바로, 동생에게 생전 안거는 전화를 먼저 걸었다. 아이들 얘기도 했다가, 엄마 아빠 얘기도 했다가, 우리 체력이 얼마나 저질 인지도 얘기했다가... 한참을 얘기하다 갑자기 훅- 하고 들어오는 나의 뜬금없는 사랑고백에 동생은 박장대소했다. 그렇다. 나는 돌려서 얘기할 줄 모르는 여자다. 그리고 동생은 "이미 다 알고 있었어"라고 답해주었다. 점점 목소리가 갈라지고 울 것 같아서 얼른 가서 애기 보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 안에 무언가가, 가벼워진 느낌이다. 아니, 떠오르는 느낌이다. 아니, 날아다니는 기분이다. 둥둥- 그 덫에서 풀려난 걸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실상, reality이니 말이다.



오늘은 부활절이다.

생명이 죽음을 이긴 날이다.

사랑이 미움을 이긴 날이다.

희망이 절망을 이긴 날이다.

그렇게 오늘, 예수님은 살아서 우리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다.




• Soli Deo Gloria •





매거진의 이전글 반찬통들이 자꾸 말을 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