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는 참 신기한 곳이에요
오늘은 쓰고야 말겠다는 심정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난 2월 18일 브런치를 처음 시작한 이래로 근 4개월 동안 한주도 빠지지 않고 글을 써서 올렸는데, 지난주부터 뭔가 덜컥하고 브레이크가 걸리더니 결국은 아무것도 올리지 못했다. 박완서 선생님은 글이라는 게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도하셨는데, 뭔가 차오르지 않아서 쓰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보글보글 차오르긴 했지만 찬물이 확 끼얹어지기도 하고, 잉태될 듯했다가 사산되어 버리고 마는 많은 조각들에 마음을 베었다. 오늘은 밥이 되든 죽이 되든 글을 쓸 것이다. 받아들여지던 내 처지던 오늘은 글을 던질 것이다.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쓰는 걸까.
나는 열매가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역류하는 감정들과 상처들을 토해 내는 글이라면 일기장에 써도 될 일이다. 하지만 공적인 글쓰기를 하는 이유는 나와 타인이라는 섬들 사이에 "공감"이라는 다리를 놓고, '나만 이렇게 사는 건 아니었구나', '어쩌면 함께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명이 흐르게 함에 있다. 나만의 글이라는 것이 모아져 누군가에게 좀 더 견고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언젠가 책을 내고 싶다는 소망도 있다.
그런 와중에 "윤승 씨, 안 팔리는 글이 있어요. 대중성을 놓고 봤을 때 쓰면 안 되는 글이요."라는 (애정이 있기에) 현실적인 조언을 받게 되었다. 그런 글들의 3종류는 이렇단다:
1. 너무 전문적인 글
2. 정치적인 색이 짙은 글
3. 종교적인 색이 짙은 글
내 글이 딱히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내 신앙의 색채가 짙게 묻어나는 건 사실이다. 그게 내 글이다. 그것이 내 글을 끌고 나가는 원동력이자 진정성의 뿌리이기도 하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려고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많이 팔려고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니 나는 그냥 내가 쓰던 대로 진심을 담아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또 다른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정말 그게 다 들려?"
하나님께 물어보고, 답을 듣고, 또다시 묻고 대화하는 과정이 (늘 잘되는 건 아니지만) 어찌 됐건 자연스럽게 일상 안에 녹여내여 쓴 글들이 어떤 분들에게는 '저게 될까?'라는 의구심으로 다가갈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이 왔다. 하지만 사실 그 질문은 뾰족한 의심이 아닌 간절한 사모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걸리는 돌부리'가 될 수 있다면. 그 불편한 돌부리 덕분에 가던 길을 멈추고 상처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덮혀져 왔던 무언가가 드러나고 "나는?"이라는 자문을 던지게 한다면. 그래서 잊혀져 왔던 그분의 음성을 향한 목마름으로 연결 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내 글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넉넉히 상쇄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글을 쓰다 보니 이런 자문도 하게 되었다: '내 삶과 글은 얼마나 일치되어 있나.' 내 모든 글들은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진심을 다해 쓴 글이지만, (특히 신앙적인 글들의) 대부분은 나에게 주어진 약속을 붙들고 선포하는 글에 가깝다. 하얀 바탕화면에 검은 활자를 꾹꾹 새겨 넣듯, 내 심비에는 그 보다 더 깊게 꾹꾹 새겨 넣는 작업이 글쓰기이다. 나는 대체로 절망하고, 아파하고, 넘어지고, 분노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그 절망과 후회 사이 어디쯤에 쏟아지는 빛을 득달같이 붙잡고 기록한다. 그 빛이야말로 현실이고 진실이기 때문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이 내 글과 늘 일치하진 않지만,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 진실과 정렬(align)되어 있다고 믿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부끄럽지만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고, 삶은 여전히 너저분하지만 마음만은 꼿꼿이 다잡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 힘으로 글을 쓸 때, 그것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빈털터리가 될 수 있는 무모하고 낯 뜨거운 짓인지. 얼마나 나는 철저히도, 공급받지 않으면 긷어 올릴 것이 없는 텅 빈 우물에 불과한지 말이다.
매일 새벽 글을 쓰기 전 필사하는 한 구절이 있다.
I am the sprouting vine
and you are the branches.
As you live in union with me,
fruitfulness will stream from within you.
If you live separated from me,
you are powerless. (John 15:5)
내가 그 나무에 접붙힘바 된 가지(branch)가 되지 않으면 열매가 되는 글이 절대로 맺히지 못함을 알고 있다. 단 한 줄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차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그것은 요란한 빈수레요, 열매 없고 생명력 없는 (powerless) 죽은 가지일 뿐이다.
브런치란 플랫폼은 그런 곳이라고 했다. 처음 브런치 작가가 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서포트해주기 위해 첫 6개월은 다음이나 카카오, 브런치 메인에 많이 노출시켜주고 조회수를 높여준다고. 나 또한 지난 4개월 동안 <부부 사이는 불쌍해지면 게임 끝이야>와 <이것만 안 하면 자녀양육은 성공인데 말입니다>로 다음 메인과 브런치 메인에 소개되며 하루에 몇천 명씩 조회수가 올라가는 충격(?!)을 겪었다.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다가 내 그릇에는 분에 넘치는 숫자들을 마주하니, 내가 불러야 하는 노래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읽힐만한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이 들었다. 마음이 저밋저밋한 격려와 응원을 받으며 계속해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까지 들었다. 내 글은 위선인가 아닌가, 내 글은 내 삶과 얼마나 괴리가 있는가,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며 급기야 지난주에는 글은 차오르나 쓸 수 없고, 썼으나 올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약속으로 돌아간다. 처음 브런치 작가 되고 공적인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나는 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틔였다. '네 글은 읽힐만한 가치가 없다고. 그러니 그냥 숨어있으라고. 다른 이들의 글을 눈팅만 하며 관망자로써의 삶을 계속해서 살라'는 내면의 소리를 죽이고, 내 입에 넣어주신 새 노래를 계속 부를 것이다. 그래서 그 글이 읽히겠냐고, 너는 글처럼 살고 있냐고, 잘못 들은 거 아니냐고 자꾸만 가지를 흔들어대는 소리가 들릴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나무에 꼭 붙어있을 테다.
그래서 맺히는 열매를 나눌 때까지,
나는 앞으로 어쩌면, 글을 막 던지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 Soli Deo Glor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