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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May 15. 2021

이것만 안 하면 자녀양육은 성공인데 말입니다.

오늘 딱 하루만. 하지 말아 보자 제발.


"얘들아, 엄마는 올해 다른 건 다 괜찮고, 너희들로부터 꼭 카드나 편지를 받고 싶어." 지난 주일은 미국의 어머니 날(Mother's Day)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차라리 다른 걸 주고 싶게 만든다는 그 부담스러운 "카드나 편지"를 요구했다. 작년까지는 아이들이 어리다는 핑계로 뭘 해줘도 그만 안 해줘도 그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마더스데이였다. 하지만 올해는 아이들이 좀 큰 느낌이어서 그랬는지 감사를 표현하는 법을 가르쳐야겠다는 (지금 보니 좀 꼰대스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부탁에 일곱 살인 둘째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문제없다는 듯이 며칠 전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진작부터 카드는 써놓았고, 작은 화분에 미리 꽃을 심어 놓기도 하고, 며칠 전엔 내가 알레르기로 코를 훌쩍거리자 저금통에서 몇 불을 주섬주섬 꺼내오더니 "여기.. 이걸로 좋은 약 사 먹어"라며 츤데레의 모습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사실 진짜 카드를 받고 싶었던 상대는 열한 살의 첫째로부터 였다. 가슴속에 깊은 바다가 있는 아이라 늘 그 생각이 궁금하기도 하고, 요즘은 사춘기 초입이라 그런지 아이로부터 표현이 부쩍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맘만 먹으면 구구절절 요술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아이라, 엄마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을 풀어 줄지 엎드러 절 받는 심정으로라도 아이의 편지를 받아 내고 보고 싶었다.


마더스데이 아침부터 제일 먼저 일어나 와플을 만들고 과일을 고르고 예쁜 쟁반에 담아 쪼로로 달려와 침대에서 아침식사를 하라는 둘째 옆에, 웬일인지 첫째가 보이지 않았다. 요리를 좋아하는 첫째이기에, 평소 같으면 새벽같이 일어나 지글지글 무언가를 만들어서 갖다 줬을 이 아이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카드나 편지 같은 건 "아직도" 쓰지 않은 눈치였다. 벌써 마음이 서운해지는 것이 왠지 오늘 하루 조짐이 불길했지만, 순간 자문이 들었다.


'그러는 너는? 너는 어버이날이라고 엄마한테 편지 썼어?'


편지는 무슨. 면피용 꽃바구니만 주문해놓고 내 할 일은 다 한 듯 뻐기고 있는 주제에 어린 딸에게서 아무 기별이 없다고 섭섭해하는 내 모습이 낯뜨거웠다. 친정엄마는 유난히도 나에게 편지를 받고 싶어 하셨다. 친구들한테는 애교가 많아도 유난히 부모님께는 무뚝뚝한 큰딸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들여다보고 싶어 하시는 게 자명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왠지 오그라드는 손발과 쪼그라드는 마음에, 정말 큰 맘을 먹지 않는 이상 편지는커녕 문자 몇 줄 보내기도 버거워했다.


그렇게 내 편지를 받고 싶어 하던 엄마에게 시큰둥했던 벌을 이렇게 받는 건가. 하루 온종일을 기다려도 첫째로부터 카드나 편지는 결국 오지 않았다. '그래, 나나 잘하자' 싶다가도,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었다가, 애써 담담한 척했다가 또다시 스물스물 서운한 마음이 올라올 무렵, 꼴딱 해가 져버렸다. 넘실넘실 검은 아우라가 나오는 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남편은 첫째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엄마가.. 오늘 카드 받고 싶다고 했는데.." 이미 섭섭 마귀 탑재한 나는, "됐어 됐어. 다음 마더스데이에는 그냥 엄마 없는 엄마의 날 해라~ 나도 담부턴 그냥 나가 놀 거야." 이 무슨 치졸한 뒤끝 작렬, 아무말 대잔치란말인가.




축 처진 어깨로 자기 방으로 돌아간 첫째는 잠시 후 무언가를 써서 침대맡에 두고 갔다.

'엄마 미안해요. 나 때문에 엄마의 마더스데이가 다 망가져버렸어요. 그래도 너무 나쁘진 않은 하루였기를 바래요. 실은, 엄마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못 썼어요. 어떻게 써도 왠지 엄마 마음에 들 것 같지 않아서요... 난 엄마를 정말 사랑하고 많이 고마워요.'


아.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나름 정말 압박 안 주고 상처되는 말 안 하려고 노력하며,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써도 엄마 마음에 들 것 같지 않았다니. 미안함과 서운함, 실망과 연민이 뭉뚱그려져 삼키기 힘든 커다란 알약이 목구멍이 걸린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엄마로서의 나의 의도가 선했던들, 내 목소리 톤과 표정에서 흘러나오는 비난과 조급함은 감춰지지 않았었나 보다. 심장이 저밋저밋 해오며 아이를 아프고 주눅 들게 했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차피 그만둘 피아노였는데 뭐가 그리 급해서 아직도 악보도 못 읽냐며 한숨을 푹푹 쉬었던 일. 둘째 태어나서 바쁘다고 제대로 한글을 가르쳐준 적도 없으면서 아직도 가나다를 모르냐며 다그쳤던 일. 나 닮아 수 개념이 약한 애한테 생각 좀 하고 답하라고 감정을 잔뜩 실어 꿀밤을 먹인 일. 아이 혼자 샤워하고 나왔는데 머리에 비눗기가 남아있는 것을 보고 아직도 (이놈에 아직도!!) 머리도 제대로 못 감냐며 눈물을 쏙 빼놓은 일. 써놓고 보니 정말 새엄마가 따로 없다. (제가 이렇게 형편없는 엄마입니다).


나는 왜 "아직도" 란 말을 이렇게 잘 쓸까. 아마 내가 정한 타임라인 안에 아이가 움직여야 하고, 이 정도는 이때까지 해내야 한다는 시간의 잣대를 아이에게 끊임없이 들이대고 있었나 보다. 누군가로부터 "넌 아직도 그러고 있니"란 말을 들으면 발끈하면서, 내가 바로 그 말을 제일 자주 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아이가 가장 자주 쓰는 말은 "잠깐만"이다. "엄마, 잠깐만." "잠시만. 이것만 하고." 아이가 "잠깐만"이라고 할 때마다 미칠 거 같았다. '빨리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뭐가 또 잠깐만이니.' 하지만 이 아이는 멈춰 서서 자세히 보고 싶고 자신의 속도대로 가고 싶은 아이였다. '아직도'와 '잠깐만' 사이의 시간차 속에서 아이는 자꾸만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나 보다. 


'난 망했어. 난 엄마로서 실패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짙은 절망감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고 첫째는 말했다. "I am a piece of junk. (나는 고물 덩어리인가 봐)." 자기의 편지가 엄마를 더 슬프게 만들었음을 보고 자책하는 말이었다. 아이와 나는 자책의 늪에서 스스로 잠식시키기를 허락하고 있었다.


그때 마음에서 소리가 들렸다. '윤승아, 지금 잘못된 거 하나도 없어. 넌 좋은 엄마야. 거짓말에 속지 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엘아, 넌 고물 덩어리가 아니야(You are not a piece of junk). 넌 네가 진짜 누군지 알지? 넌 누구니?" 아이는 발그란 얼굴로 대답했다."나? 난... 난 사실.. 걸작품이야 (I am a masterpiece). 그리고 엄마, 엄마도 최고의 엄마야. 잊지 말라구."




하나님은 그날 이후로 나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윤승아, 나는 너에게 '아직도'란 말을 한 적이 없단다. 난 늘 너를 기다리고 있거든. 너도 하엘이를 기다려줄 수 있니? 하엘이의 '잠깐만'에 '기다릴게'로 답해 줄 수 있니?"


"딱 오늘 하루만, 비난과 정죄 없이 믿어줄 수 있겠니?"


'엄마로서 실패했다'는 정죄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있는 나에게 진리의 소리는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고물 덩어리같이 보잘것없는 존재야'라는 정죄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있는 아이에게도 '있잖아, 나는 사실 걸작품이야'라는 진리의 소리 또한 들어가기 힘들다. 자꾸 뭔가를 잘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최선을 다해 더 많이 해주려고 버둥대는 것보다, 차라리 하지 말아야 할 걸 하지 않는 게 훨씬 좋은 육아임을 알았다. 쓰레기 더미 위에 자꾸 꽃을 심고 치장을 해봤자,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이다. 쓰레기를 깨끗이 치워주고 자리를 닦아줄 때 씨앗은 더 잘 자란다.


무엇이 쓰레기일까? 판단과 정죄의 말. 비방과 비난의 말. 거짓된 자아상을 심어주는 말들. 그 위에 아무리 좋은 걸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봤자, 다 함께 썩을 뿐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애쓰는 걸까? 잘못될까 두려우니까. 쓰레기를 치우는 건 힘들지만 그 겉에 하얗게 회칠을 하는 건, 쉬우니까.


내가 그토록 바싹 컨트롤하고 싶어 하고, 두려워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아이가 사춘기 초입인 것 같다'는 지레짐작 때문이었다. 주변에서 듣는 '요즘 아이들의 사춘기'에 대한 묘사는 무시무시했다. 한껏 가드를 올리고 아이를 탐색하는 나의 민감함은 없던 사춘기마저 생기게 만들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은혜를 구하며 결심을 한 것이 하나 있다. 아이에게 이어져 있던 나의 줄을 탁. 하고 놓은 것이다. 그것은 조종과 통제의 줄이었다. 내 마음대로, 내 시간표대로, 내 영향권 안에서 아이를 좌지우지하려고 묶어둔 줄을 끊었다. 나의 줄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아이의 삶에는 비로소 은혜의 줄이 연결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아주 신나는 약속을 하셨다. 사춘기는 어렵고, 예민하고, 부모 자식 간에 상처만 남는 두려운 시간이라는 것 또한 우리의 믿음으로 실상이 되는 거짓임을 알려주셨다. 우리 아이들의 십 대를 기대하라고 하셨다. 열여섯 살의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렸듯, 우리 모두의 아이들도 십 대의 용사로 세움 받아 세상의 골리앗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잔치의 시간이 오기를 준비하며 내가 해야 할 것은, 

비난과 정죄로 진리의 소리를 막지 않는 것.

내 욕심과 만족을 위해 많은 것을 채워주기보다, 비워줘야 할 쓰레기를 비워주는 것.

그리고 내가 기다림 받았듯 기다려주는 것일 테다.


너무 앞서 내다보지 말고, 

딱 오늘 하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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