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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Apr 17. 2021

들어는 봤나, <지랄 총량의 법칙>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만으로 아홉 살인 첫째 하엘은 아기 때부터 세상 키우기 쉬운 딸이었다. 낯도 안 가리고 누구한테나 생글생글 웃으며 잘 가고 (물론 엄마가 보고 있다는 전제하에), 배달 이유식을 먹여도, 새로운 음식을 접해도 까탈스러움 없이 뭐든지 맛있게 잘 먹었다. 씩씩하게 잘 뛰어놀다가 피곤하면 아무데서나 잘 자고, 돌 이후부터는 엄마 학교 가야 한다고 헤어질 때도 쿨하게 빠빠이 하며 즐겁게 생활해주었다. 덕분에 하엘이가 만 한 살 때 시작한 풀타임 대학원 공부도 무리 없이 마칠 수 있었다 (졸업식날 나 대신 학사모를 쓰고 함께 단상에 올라 졸업장을 같이 받은 것은 엄마의 공부를 응원해준 아이가 마땅히 누릴만한 특권이었다).



하엘이가 만 25개월 때 처음 풀타임 데이케어를 시작했을 때, 그래도 첫 2주 정도는 울고불고 고생을 좀 했더랬다.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하엘아, 오늘 재미있었어?" 하면, "응.. 그렇긴 했어. 근데 또는 못 갈 거 같아... 나 오늘 열심히 울었어."라고 말했다. 어느 날은 좀 일찍 데리러 가서 waiting area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엄마, 여기 있었어? 나 저 안(classroom)에서 계속 엄마 잘 있나 걱정하고 있었어."라며 내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기도 했다.


처음 데이케어를 다니기 시작했던 한 달 내내, 건물 안으로 같이 걸어 들어가는 길에 아이와 함께 기도하며 Coram Deo의 하나님 - 내 앞에 항상 계시는 하나님 - 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하엘아, 하엘이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를 부르면, 엄마는 언제든지 달려올 거야. 그렇지만 엄마가 하엘이한테 아무리 아무리 빨리 달려와도 적어도 삼십 분은 걸려. 근데 예수님은 "예수님~" 이렇게 한 번만 불러도 바로 앞에 딱 오셔서, 하엘이를 지켜주실 거야. 그러니까 유치원에서 울고 싶을 때마다, 엄마 부르기 전에 예수님부터 불러. 알았지?"라고 매번 얘기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케어 주차장에 내리면 "다 왔네. 나 이제 엄마 빠이 할 거야. 예수님 부르고 안 울 거야."라며 씩씩하게 들어가던 고마운 딸이었다.


하루는 데리러 가니까 하는 말이, "엄마, 나 오늘 유치원에서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거 같았어. 그래서 '하나님, 엄마가 없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괜찮아, 내가 여기 있잖아.' 그러셨어."라고 티 없이 맑게 말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네가 정말 내 딸이라니. 나한테서 너 같은 애가 나왔다니!' 감탄을 하며 마냥 행복하기만 한 시절을 보냈었다.




그에 반해, 분명히 같은 공장 제품인데 우리 둘째는 누나와는 너무 달랐다. 그 당시 나는 박사 준비를 한다고 둘째를 낳자마자 한국에서 오신 입주 도우미 할머님께 아이를 맡기고 연구실을 다니고 있었다. 둘째가 9개월 때쯤, 사정이 생기신 할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시자, 그때까지 할머니가 엄마인 줄 알고 살았던 아이는 곡기를 끊고 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계속해서 밥을 안 먹는지 소아과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가면 백분율 체중이 8%대까지 내려갔다고 했다. 이 모든 게 다 내 잘못인 거 같아 나 또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서, 출산 후 원래 체중으로 돌아온 후에도 추가로 7킬로가 더 빠져 해골이 따로 없었다. 외국에서 홀로 육아를 하는 게 이렇게 서럽고 힘든 일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끼며 심신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또 아이에게는 분리불안도 생겼던지, 집 안에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갈 때도 내 가슴팍에 꼭 안겨 이동해야 할 정도로 나와는 24시간 한 몸이었다. 밥을 이토록 안 먹는 아이라니. 이렇게 예민한 초강력 껌딱지가 있다니. 보통 첫째 때는 육아가 처음이라 좀 고생하고 둘째부터는 쉬워진다던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첫째 때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육아 실미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첫째를 키우며, 나는 인내심도 많고 상냥한, 꽤나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던 자화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내가 얼마나 참을성이 없고 화를 잘 내는 엄마인지, 얼마나 짜증이 많고 날카로운 소리를 낼 수 있는 엄마인지 여실히 드러나는 나날들이었다.



둘째가 유치원을 들어가면, 나가서 뛰어놀고 친구들이랑 점심도 같이 먹을 테니 좀 나아질까 싶던 나의 기대는 등원 첫 주부터 씨알도 안 먹혔다. 집에 돌아와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면, 한입이라도 더 먹이려고 정성을 다해 싸준 음식은 거의 그대로고, 하루 종일 블루베리 3알 먹고 온날이 전부였던 적도 있었다. 이 피 말리는 터널은 언제쯤 끝이 날는지 기약이 없었다.


(기적적인 것은, 오히려 둘째 아이와의 육아로 인해 정말 나는 누구인지, 나는 누구 딸인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탐색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은혜 없이는 내가 얼마나 절망적인 인간인지 깨닫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내 커리어를 위한 욕심이 아이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자책감, 나는 나쁜 엄마라는 죄책감,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무력감이 더해져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쉬었을때 두 명의 대학생 자녀들을 키우고 계신 왕언니는 말씀하셨다. "너 그거 아니? '지랄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어. 아이마다 겪어내야 하는 어려움들은 끝에 가서 총량으로 따져 보면 그게 그거라는 거야. 나중에 썩이나 지금 썩이나 결국 속 썩이는 건 다 똑같다는 거지. 지금은 얘 때문에 힘든 거 같아도, 앞으로 얘가 또 어떻게 좋게 풀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그 말이 맞았던 걸까? 요즘은 그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큰소리 한번 안 내고 키웠던 큰 딸은 나도 모르는 사이 사춘기 초입에 다다랐는지, 부쩍 예민해지고 속 깊은 고민들이 많아졌다. "하엘아, 엄마 말 듣고 있니?" 하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아이를 자꾸만 긷어 올린다. "엄마,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왜 이런 많은 생각을 하는 거지? 나는 대체 잘하는 게 뭐지?" 문득문득 아이가 던지는 질문들에 놀라지만 놀라지 않은 척하는 것이 어렵다.


며칠 전에는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뒷좌석에 탄 하엘이가 물었다. "엄마, 내가 보니까 어렸을 때는 부모님들 따라서 교회를 잘 다니던 애들도 커서 어른이 되면 더 이상 교회도 안 다니고 하나님도 안 믿는 거 같아. 왜 그러는 걸까..? 나도...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부모로부터 주입식으로 전수되는 믿음이 아닌, 본인의 주체적인 믿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막상 아이의 입에서 저런 고백을 직접 들으니 운전을 하다가 마음에서 쿵. 소리가 났다. 본인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왜 믿어야 하는지도 의문이 들고, 이런 질문이 든다는 거 자체가 왠지 불경하게 느껴졌는지 약간의 죄책감도 섞여있는 말투였다. 아이의 질문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뭐? 당연히 그렇게 되면 안 되지! 너 왜 그런 고민을 하는 거야.'라는 지극히 종교적인 마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나의 불안이 아이의 불안으로 스며들면 안 된다는 분별이 되었다. "맞아 하엘아. 엄마의 믿음이 네 믿음이 될 수는 없어. 결국 모든 사람은 각자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야 해. 아무리 부모가 끌고 가도 소용없지. 하지만 하나님이 그러시더라. 하엘이가 엄마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그래서 엄마는 너 하나도 걱정 안 돼." 불안이 들어올 한치의 틈도 주지 않고 싱긋 웃으며 대답했더니, 하엘은 크게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엄마가 걱정 안한댔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되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을까. 나도 모를 걱정과 염려로 치닫으며 아이에게 정죄감을 심어줄 뻔했던 순간을, 하나님은 내 입을 막으시고 예언적 선포를 하게 하신 순간이었다.


'그래.. 네가 생각이 많고도 많고도 많은 것은 엄마를 똑 닮았으니 뭐라고 할 수는 없다만, 그래도 너 만큼은 나처럼 복잡하게 살지 말고 단순하게 살았으면 했는데...' 고민의 심연에 빠진다는 게 어떤 무게인지 너무 잘 아는 나로서는, 아이 마음이 100번 이해 가면서도 101번 그 심연에서 아이를 구출하고 싶었다. 첫아이라 그런지 더 애틋하고 (그러면 안되지만) 자꾸 나와 동일시되는 마음을 걷어내는 게 쉽지 않았다. 아이로 인해 틈만 나면 내 안에 불어오는 강풍에 잠시만 중심을 놓쳐도 내 정신줄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이 아이 때문에 생전 마음고생이라는 걸 안 해보다가, 이렇게 몰아서 불어닥치는 바람은 때때로 나의 하루를 온전히 휘청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육아 실미도를 실시간으로 경험시키며 "지랄"의 총량을 일찌감치 가득 채워놓으신 우리 둘째는 요즘 어떠신가. 잘한다. 좀 과장해서, 손댈 데가 없다. "잘한다"의 정의가 무엇이냐면, 나를 찾지 않고 스스로 한다는 거다. (야호!) 첫째 딸 하엘은 성향상, 아무리 목표를 세워줘도 본인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보상을 해주고 거래를 꾀해도, 본인이 하고자 하지 않으면 전혀 그 보상들이 달갑지 않고, 억지로 시키는 일들은 나무늘보같이 느릿느릿해서 내 복장을 터지게 한다. 근데 어찌 삶이 그러겠느냔 말이다. 어찌 재밌어야지만 할 수 있냐고. 짜여진 루틴과 매일의 목표, 나만의 박스 안에 머무는 것이 너무 편하고 그것 자체로 안정감이 되는 나의 천성에는 정말 안 맞는 캐릭터의 딸이다. 나는 분 단위로 하루를 계획하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그래서 하엘을 바라보고 있으면 도를 닦는 기분이 된다. 대신 그녀는, 한번 흥미가 붙으면 멈출 수가 없다. 책 읽기와 글쓰기,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운동이 그렇다. 수학과 악기 방면에서는 늘 힘겨워한다 (그래서 최소한만을 한다).


그에 반해 우리 둘째는 나의 성향을 많이 닮았다. 모든 가족들의 스케줄을 요일별로 줄줄이 꿰며 "엄마, 다음엔 여기지? 지금부터 준비해."라고 말하기도 하고, 우리 집에서 뭔가가 없어지거나 빠트리면 제일 먼저 어디선가 찾아서 들고 나타나는 탐정이 따로 없다. 엄청난 목표지향적 인간인 것도 그렇다 (재미가 있건 없건, 하고 싶건 말건은 그에게 별로 중요치 않다). "오늘 할 것 다 해놓으면 보고 싶은 만화 20분 보게 해 줄게"라고 말하면 딸은 "음... (보고 싶지만 그거 하느니) 안 봐도 돼."라고 본인만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반면, 둘째는 "OK!!!"라며 터보 엔진을 장착한 레이스카처럼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오늘은 워크북 하지 말고 그냥 자... 엄마 너무 피곤하다"라고 먼저 자버리면, 자기는 하기로 한걸 끝내기 전까지 잘 수 없다며 나를 흔들어 깨우는 무서운 녀석이다. 나의 성향과 비슷하여 저 놈이 어떤 회로로 돌아가는지 이해하기 때문에, 많은 영역에서 쿵작이 맞는다. 심지어 밥 먹을 때도 이 목표의식이 통한다. 그래서 예전보다 훨씬 잘 먹게 되었다. (물론 나의 육아 방식이 교과서적으로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우리 아이들의 성향을 잘 관찰해서 최적화된 방식을 찾으려고 고군분투 중이다).




본질에 대한 하엘이의 깊어가는 고민들을 마주하며, 차라리 다른  아이라면 ", 벌써 그런 고민들을 하는구나. 그런 고민들은 아주 중요한 고민들이야"라고 격려해줬을  같은데, 막상  아이가 머리를 싸매고 힘들어하니 그저 평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정서적으로 놓친 부분이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민감하게 신경을 많이 써줘서 그런가? 온통 화살은  자신에게로 쏠리며, 다시 성취 지향주의(performance-based)적인 나의 성향이 꿈틀거렸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아이를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 얼른 아이가 괜찮아지므로 내가 편해지고 싶었다). '대화를  많이 해보면  거야. 좋은 말씀을  많이 먹여볼까. 기분을   맞춰줄까. 짐짓 모르는 척해볼까.'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며 아이의 마음을 살피려니,  마음대로 아이가 반응하지 않는 날은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까지 해도 안되면   해야 하지?'



대체 뭘 어떻게 해주면 되는지 하엘이에 대해 고민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너무나 심플하게 대답하셨다.


"나는 하엘이의 모든 것이 다 고마워."

"이 아이는 지금 나에게 오는 길이야."


"윤승아, 네 안에 뿌리 박혀 있는 정죄감의 칼이 아직도 너를 찌르고 그것을 하엘이에게도 휘두르고 있구나. 자꾸만 하엘이에게 무엇을 잘해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단다. 네가 그렇게 노력했을 때 하엘이가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거기서 또 다른 정죄함이 생기지 않니. 네 안에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니? 그 사실을 믿는다면 그 진리에 너를 정렬(align)시키렴. 무엇을 계속 하려고 하지 말고, 너와 내가 함께 있는 상태에 거하는 연습을 해봐. 하엘이에게 주파수를 맞추는 게 아니라 나에게 주파수를 맞춰보렴. 그럼 doing 이 아닌 being의 상태가 되는 거야. That's what it means to live in union with me. And fruitfulness will stream from within you."


그러면서 하엘이가 스스로 고백하게 될 말씀을 약속으로 주셨다.

"I found the one I adore!

I caught him and fastened myself to him,

refusing to be feeble in my heart again.

Now I'll bring him back

to the temple withtin

where I was given new birth

into my innermost parts,

the place of my conceiving."

(아가서 3:4)


신랑 될 솔로몬 왕을 찾아 힘들게 헤매던 술람미 여인이 드디어 그를 만났을 때 했던 그 사랑의 고백을, 하엘이의 입술로 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 해 주셨다.


이 아이가 혼자 시작한 여정을 내가 대신 가주지 않는 것. 엄마로서 많은 것을 노력하며 힘겹게 애쓰는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내가 먼저 나의 여정을 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리고, "나는 이 아이의 모든 것이 고마워"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처럼, 나도 아이의 모든 순간을 감사하는 것.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내 안에 좌불안석 어쩔 줄 모르던 불안과 두려움이 떠나가는 것을 느꼈다.





밤에 하엘이가 잠들기 전 함께 침대에 누워 하엘이에게 말했다. "하엘아, 엄마랑 손을 잡고 있다가 한번 놔 봐." 하엘이는 버둥거리며 손을 놓으려고 했다. 그럴수록 나는 그 아이의 손을 더 꽈악 잡으며 절대 놓지 않았다. "보이지? 네가 아무리 손을 놓고 싶어도, 안 놓아지지? 네가 놔버려도, 하나님은 절대 너 안 놔버리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잘 자."



하일에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곧 잠이 들었다.

나도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 Soli Deo Gl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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