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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May 08. 2021

후회와 미련의 아이콘들에게

자꾸만 미련이 남는 일


누구보다 밝고 에너지 넘쳤던 S언니가 급작스레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서둘러 한국으로 떠나셨던 날을 기억한다. 모두의 걱정을 뒤로하고 언니답고 씩씩하게 "다녀올게"하셨다. 작년 여름 한국에서 언니를 다시 만난 건 병원이 아닌 동네 카페에서였다. 급성이라고 했었지만 그동안의 시간을 잘 견디고 있는 언니를 웃는 얼굴로 만나니 못내 마음이 놓였다. "언니, 치료 잘 받고 내년 여름에 한국 오면 또 만나요!"라는 인사가 무색하게, 언니는 두 달 뒤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함께 아이들을 키우고, 몇 년을 매주 만나 삶을 나누던 언니의 죽음은 실로 실감 나지 않는 이별이었다. 두 달 전만 해도 기적처럼 털고 일어날 것만은 사람이었는데.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닥칠 수 있는 일이란 걸 깨닫고 난 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만약 당장, 혹은 1년 내에 죽는다면, 뭐가 가장 아쉽고 미련이 남을까' 했을 때 두 가지가 떠올랐다.


'나 스스로 내가 누군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고 죽게 되었을 때.'

'내 아이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되었을 때.'


문득, 옷장 한구석에 처박힌 비싼 카메라가 꼭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급 사양에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 성능들을 하나도 모르는 채로 가장 기본적인 셔터만 찰칵찰칵 눌러대는 사람. 예술작품용 카메라를 가지고서도 한평생 셀카만 찍어대는 사람. 퓰리처 상을 받은 작가들이 쓰는 카메라라는 걸 알았는데, 이것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곧 폐기 처분해야 한다면 어떨까.


나는 값비싼 주방기구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몇 년 전 이사 온 우리 집 주방에는 요리를 엄청 좋아하시던 전주인 할아버지가 놓고 가신 최고급 브랜드의 오븐과 스토브가 있다. 내 돈 주고는 절대 손 떨려서 살 수 없는 가격의 오븐과 스토브를 두고 가시다니 왠지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있으면 뭘 하나. 요알못의 나는, 셰프의 그릴에 기껏해야 라면 끓일 물을 올리고, 카레 한솥을 올려놓는다는 것이 스토브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분명 이리저리 화력을 조절하면 레스토랑 부럽지 않을 요리가 태어나는 장소일 텐데, 주인을 잘못 만나 최대역량을 발휘 못하는구나. 난 뭐든지 갖고 있어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구나. 모든 사물마다 다 쓰임새가 있고 function이라는 게 있는데. 나 또한 분명 어떤 쓸모와 목적이 있는 삶으로 지음 받았을 텐데. 내가 정말 그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 이 땅에 온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것만 한 미련이 어딨을까.


사실 두려웠다. 어디 내놔도 꿀리지는 않는 학벌과 스킬 셋을 허리춤에 차고도, 쓸 줄을 몰랐다. 아니, 쓰고 싶지 않았다. 못할까 봐 무섭고, 나와 남들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할 바엔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냥 허리춤에 최신 공구 하나 더 달았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 살아왔다. 그렇게 내가 누구인지 탐색하고 이해하며 달려오기보다는, 그저 이름과 간판만을 쫓아오다 보니 빛 좋은 개살구가 된 기분이었다. 화려한 연장은 즐비한데 필살기가 없는 사람. 망하느니 시작을 안 하는 사람. 남들은 다섯 달란트를 주면 또 다섯을 남겨오고, 세 달란트를 주면 또 셋을 남겨 온다는데, 나는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게 무서워 그나마 있는 한 달란트마저 땅에 묻어 놓은 '악하고 게으른 종'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직은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피해 다니는 무익한 종의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살다가 S언니의 부고를 접했을 때, 드디어 주인이 돌아온 것만 같았다. '네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남겼니?' 하고 주인이 물어본다면, 나는 갈라진 입술 사이로 할 말이 없었다. 


더욱이 나의 아이들조차 엄마가 누구였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었는지 모르고 죽는다면, 진정 엄마를 가졌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반쪽이라는 남편은 내가 정말 누구인지 알았을까. 나를 낳아준 부모님이라고 나를 정말 아셨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무엇이라도 시작해야 했다. 이제까지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현실에 대한 안주함으로 스스로를 자위하고 있던 시간은, 어쩌면 예고도 없이 단칼에 끝날지도 모르니까. 나는 먼저 나를 찾아야 했다. 내가 나를 찾아가는 과정, 또 나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과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딱 두 가지, 글과 그림뿐이었다. 다시 박사과정으로 돌아가는 것도, 로스쿨을 시작하라는 남편의 조언도, 세상의 그 어떤 보암직한 타이틀도,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래, 그거 하다 죽길 잘했지"라는 대답을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올해 1월 25일부터 시작한 나를 찾는 글쓰기의 과정은 오늘로 104일을 맞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주말이고 휴일이고 여행 중이고 상관없이, 매일 새벽 4시 나만의 자리로 기어 나왔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지만 무언가를 매일 쓰며 혼자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의 글에 함께 눈물 콧물이 흘러나온다는 독자분들의 피드백은 세상의 그 어떤 타이틀보다 더 큰 힘을 실어준다. 


이런 나날을 살아내는 동안 "자꾸만 미련이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며칠을 아무리 고심해봐도 '미련 남는 일이... 없는데... 헐? 내가? 미련이 없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처럼 미련과 후회의 아이콘인 사람이, 딱히 미련 남는 일이 없다는 것이. 맞다. 한 평생 나의 별명은 "미련과 후회의 아이콘"이었다. 그만큼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에 목을 매느라 선택한 길 안으로 발걸음을 떼는 일을 하지 못했다. '그때 이 학교 말고 저 학교를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내가 미쳤지, 그때 그 이상한 놈과 연애 안 하고 그 시간에 자기 계발을 열심히 했더라면!' '그때 연구실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남아있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가슴을 옥죄며, 한번 시작하면 며칠밤을 하얗게 지새우게 만들던 미련의 족쇄들이 어느 순간부터 힘을 잃게 되었다. 그 어느 순간이란, "God always gives the best"라는 문장이 날 자유하게 하면서부터 였다. 


하나님은 나에게 물으셨다. 

'나의 best 가 너의 best라는 걸 믿니?'


그 질문은 믿음 좋은 척하며 한편으로는 홀로 내 살길을 도모하던 나의 가면을 벗기고 진심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한때 나도 "하나님, 사실 그거 정신승리 아니에요?"라고 되물은 적이 있다. '하나님 뜻대로 되는 게 제일 좋은 거라는 거, 그거 그냥 내 마음 편하자고 두리뭉실 넘어가버리는 긍정적 마인드셋의 최고봉 아니냐고요.' 하지만 정신승리와 믿음은 사실상 정 반대되는 개념이다. 정신승리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 정신승리는 내가 나의 온 정신과 의지를 끌어모아 나에게 집중하고 나에게 긍정적 최면을 걸 때 도취되는 일종의 자위행위이다. 믿음의 중심에는 철저히 내가 없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음을 알고 내 인생의 오너쉽을 내어드리는 행위이다. 더 이상 내가 오너가 아니므로 내가 혼자서는 바랄 수 없는 일들을 바랄 수 있고, 꿈꿀 수 있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아마 앞으로도 내 인생에는 종종 잘못된 선택들과 반복되는 실수들, 미련과 후회를 불러일으킬 만한 일들이 계속해서 있을 것이다. '한창 아이들 민감한 시기에, 이런 일을 벌여도 되는 걸까?' 반대로, '한창 쭉쭉 뻗어 나가야 할 시기에 이렇게 아이들만 보고 있어도 되는 걸까?' '다들 저렇게 잘 나가는데, 나는 이러다 잊혀지는 거 아니야?' 하며 항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연민을 버리지 못하고, 지금 가고 있는 길에 대해서는 기름이 떨어져 가는 자동차처럼 불안한 마음으로 덜덜 거리며 나아가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허락된 것이 분명 가장 좋은 것이야'라는 믿음은 작고도 놀라운 일을 해낸다. 눈 씻고 찾아봐도 원망뿐이 남은 게 없는 그루터기에 감사의 싹을 틔워내는 것이다.


나를 찾는 글쓰기가 앞으로 어떻게 열매를 맺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이 "앞으로 어떻게"를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은"이 시작이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는 전에 없는 기적이다. 내가 무슨 능력자라도 되는 듯 A부터 Z까지의 스텝과 Plan B 없이는 시작하지 않는 피곤한 완벽주의자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단어가 바로 "일단은"이기 때문이다. "일단 시작"은 미련을 뿌리 뽑는 가장 좋은 장치이다. "일단 시작"은 내 능력으로 못한다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하다. 일단 시작하자. 사랑이든, 모험이든, 회복이든, 용서이든. 미련은 자꾸만 자라나는 것이고, 우리에게 일생은 단 한 번뿐이니까.


• Soli Deo Gl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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