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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Apr 23. 2021

내 아빠의 나빌레라

아직 늦지 않았어요, 날아올라요.


내 아빠는 내가 아는 남자들 중 가장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첫째 딸인 나의 결혼식날 아침, 아빠는 아침 기도를 드리다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우셨고 (오해 없으시길. 내 신랑은 아주 좋은 사람이다)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에는 공항에서 한참을 찾아도 없어서 보니 기둥 뒤에 서서 오열하고 계셨다. 사랑 많고 눈물 많은 나의 아빠는, 언제나 그렇게 내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일곱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왁자지껄한 대가족에서 자라난 엄마는 엄마의 개구진 어린 시절 이야기해주길 좋아했다.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 혼나고 맨발로 다람쥐처럼 동네 구석구석 도망 다닌 이야기, "돼지 산소"라고 불리던 동네 뒷동산에서 뛰놀던 이야기, 온 동네 아이들의 구슬은 다 빼앗고 다니던 골목대장 이야기까지. 오래된 보물을 꺼내 놓듯 나와 동생 앞에서 엄마의 어린 시절 추억들을 신나게 풀어놓았다. 우리는 군고구마를 까먹고 짱구 과자를 주워 먹으면서 배꼽을 잡고 깔깔거렸다. 장난꾸러기 엄마가 눈에 선했다. 온 가족이 함께 다 웃고 있는 시간에도, 아빠는 늘 옆에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초등학생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빠, 아빠도 어렸을 때 얘기해줘~"라고 물어보면 왠지 안될 거 같았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아빠의 유년시절이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늘 엄마가 해주었다.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 숨죽여 소곤소곤하게 말이다. 아빠의 친아버지는 아빠가 기억도 못하는 아기 때 돌아가셨고, 친할머니는 나중에 재혼을 하셨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경제력 없는 여자가 남자 없이 혼자 세상을 살아가는 게 쉽지 않은 시대였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가 재혼을 한다는 것은 가난하고 말 많은 시골마을에서는 꽤나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이었나 보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새아버지는 아빠와 할머니를 하루가 멀다 하고 때렸고, 아빠는 친구네 집에 도망치듯 가서 살아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얼마나 할머니를 때렸는지, 할머니가 맞다가 기절하셨다는 전화를 받으면 집으로 달려가 실신한 할머니를 챙겨야 했을 어린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어쩌지 못할 연민과 '내가 어쩌다'라는 후회가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말미에는 항상 '그래서 엄마는 아빠가 불쌍해서 결혼했잖니'라곤 했다.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사실 어린 나에게 그 말은 매번 정말 듣기 싫은 소리였다. '엄마가 좋아서 연애결혼해놓고 왜 불쌍해서 했다 그러지? 그럼 아빠는 뭐가 되지?' 구원으로 여겼을 여인으로부터 구원이 아닌 동정을 얻는 아빠가 안쓰러웠다. 그러면서도 '난 절대 안 불쌍한 남자랑 결혼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유년 시절의 아빠는 나에게 사랑 그 자체였다. 가난한 살림 속에 사랑을 많이 받기는커녕 서슬 퍼런 가정폭력 속에서 자랐으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부드럽고 다정스레 딸들을 사랑할 수 있는지, 지금 돌아보면 기적이지 싶다. 아빠는 나에게 한 번도 큰소리를 낸 적이 없었고, 매를 든 적도, "안된다"라고 한적도 없었다 (무서운 훈육은 언제나 호랑이 같은 엄마의 몫이었다). 아빠는 퇴근길이면 지하철 노점상에서 사 온 장난감이랑 인형들을 내어주며 뽀뽀를 해주고 목마를 태워주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해주었다. 아빠는 언제나 예스맨이었고,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슈퍼맨이었다. 퇴근길 저 멀리서 양팔을 넓게 벌리고 나에게 걸어오는 아빠를 향해 달려가는 게 좋았다. 아빠에게 달려가며 내 뺨을 스치던 그 초여름 밤의 온도가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머리가 커가고 눈치가 빤해지면서, 나는 '아빠가 다정하고 헌신적이긴 하지만 어쩌면 좀 무능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사실 아빠는 그 누구보다도 근면하고 성실했지만, 전형적인 여장부 사업가 스타일의 엄마의 기준에서는 항상 "그릇이 작고 답답한" 남자인 듯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늘 못마땅해했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대하는 게 숨이 가빴다. 그러면서 집에서 아빠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게 어린 내 눈에도 보였다.


아빠는 내가 어렸을 때 생각하던 슈퍼맨이 아니라는 걸, 아니 사실은 소심하고 잘 상처 받는 사람이란 걸 체감한 건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하면 서다. 표면적으로는 우리의 교육을 위해서 (실제 내 느낌으로는 한국을 벗어나 언제나 더 큰 세계를 갈망했던 엄마의 원대한 꿈 때문에) 아빠는 40대 후반이란 늦은 나이에 등 떠밀리듯 이민 생활을 시작하셨다. 아빠가 원해서 한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빠는 엄마와의 충돌을 싫어했고 초인적으로 인내심이 강했다. 엄마는 한국에 남아 사업을 계속하기로 하시고, 아빠만 혼자 이민 수속을 밟느라 우리보다 2년 정도 먼저 미국에 도착하셔서 자리를 잡으셨다. 나중에 나와 동생이 미국에 도착해서 짐 정리를 하다가 아빠의 책상 서랍 안에서 종이뭉치 한 움큼을 발견한 적이 있다. 가족들도 없이 밤마다 혼자서 영어 문장들을 필사하며 열심히 공부했던 흔적들이었다. 쉰이 다 된 나이에,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가족을 위해 두렵고 무서운 모험을 시작한 아빠에게 미안했고, 왜 아빠는 계속 불쌍해야 하는지 수취인 불명의 원망이 들었다.


하지만 안쓰러운 마음도 거기까지였다. 미국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며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11학년이 되었을 때, 내 친구들의 아빠들은 교장선생님과 사적인 미팅을 하며 자녀들의 대학 진로 상담을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를 위해 늦은 나이에 미국에 와서 아빠 혼자 많은 것을 희생하고 계신 것만으로도 고마웠기 때문에, '부모님들까지 나서서 입시 상담 따위 안 해도, 난 까짓 거 혼자서 더 잘 해낼 수 있어' 라며 이를 악물고 뛰어다녔다. 실제로 이곳저곳에서 좋은 성과를 내었고, 상 받으러 부모님 모시고 학교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막상 아빠는 내 학교에 오는걸 너무 싫어했다. 아무래도 영어도 불편하고 미국 사람들 만나는 것도 어색하니, 내가 상 탄 것은 기쁘지만 아빠의 안전지대 밖으로 나오는 것은 몹시나 거북했던 것 같다. 이 상, 저 상 알아서 척척 받아와도, 상 받으러 가야 한다고 하면 갑자기 기분이 저기압이 되는 아빠의 눈치를 보느라 왠지 죄짓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마다 서운한 마음에 아빠랑 대판 싸우고, 상 받으러 가는 자리마다 울었다. '이럴 거면 미국에 혼자 올걸. 차라리 날 기숙학교에 넣어달라고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저런 생각을 하며 서러움과 시건방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내가 부모가 되어 돌아보니, 사춘기 딸 둘을 아내도 없이 기러기 아빠로 혼자 키우며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을지 상상이 안 간다. 딸들 혼자 험한 미국에 못 보낸다고 따라와 주는 아빠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한다는 거냐. 아빠 덕분에, 안전한 집에서 따뜻한 밥 먹으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중년의 아빠가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을 그렇게 삼키고 버틴 것은,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엄청나게 참고 견뎌본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희생이었구나 싶다).


아빠에게는 그렇듯 1도 신경 안 써도 되는 딸로 시작해, 이제는 곁을 안 주고 거리를 두는 차가운 딸이 되어버렸다. 아빠는 아직도 머나먼 미국 땅의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 걸러 "뭐 필요한 거 없니?"라고 물어보신다. "없어요. 다 있어요"라는 대답이 10번 중 9번이지만, 가끔 가다 "이런 게 필요해요"라고 말하면 안 봐도 비디오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엇이든 구해다 주시는 아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빠는 아직도 날 만나면 내 손을 잡고, 유난히 작은 내 새끼손가락을 이뻐하신다 (사실은 뼈가 좀 휘어서 짧고 못생긴 손가락이다). 내 새끼손가락이 작기 때문에 내 손이 더 이뻐 보이는 거라고 하셨다. 아빠에게 틈조차 주지 않는 나 대신, 어린 시절의 나를 꼭 빼닮은 손녀 하엘은 아빠에겐 편견 없는 기쁨이다. 하엘이에게 할아버지는 예스맨이고 슈퍼맨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남을 것이다.




작년 여름에 강원도 홍천 근처에 카페 겸 레코드 샵이 생겼는데, 아빠는 홍천에 계신 김에 그곳을 꼭 들렀다 가고 싶다고 하셨다. 목적지인 서울로 가는 길을 벗어나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아빠랑 둘이서만 오래도록 차 안에 있는 게 좀 어색하기도 하고 빨리 집에 가고도 싶었지만 아빠가 꼭 가고 싶다고 하시니 들렀다 가기로 했다. 코로나 때문인지 손님이 아무도 없던 그곳엔 1,2층에 걸쳐 몇천 장의 LP판들이 층층이 꽂혀 있었다. 아빠는 몹시 흥미로워하고 부러워하며 그곳을 둘러봤다. "와.. 여기 사장님은 이걸 다 어떻게 모으셨을까? 평생 모으신 건가보다." 곰돌이 푸우 같은 배를 앞으로 내밀고 뒷짐을 지며 이곳저곳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아빠의 모습이 신기했다. 생전 쇼핑을 좋아하지 않고 무엇하나 사는 걸 본 적이 없던 아빠에게서 보이는 모습은 마치 태어나 처음 장난감 가게에 들어온 것 같은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잔잔한 음악 속에서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아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흥분한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지루한 표정의 어른처럼 카페 대문 앞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나를 의식했는지, 아빠는 아이스커피를 한잔 테이크아웃한 후 금방 다시 길을 나섰다.


그날, 그 레코드 샵에서 황홀경에 빠져있는 아빠를 몰래 찍은 사진


아빠는 어렸을 때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아빠는 노래를 참 잘 불렀다. 음정과 박자도 정확했고 절대음감도 있었다. 음악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너무 가난했고, 폭력적인 새아빠가 돈 많이 드는 음악공부를 시켜줄 리 만무했다. 아빠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교회 성가대에서 테너를 맡으시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신다. 성가대는 아빠가 무료로 할 수 있던 유일한 음악 활동이었을 테다. 난 어렸을 때부터 주일날 예배 후 아빠의 성가대 연습 끝나길 기다리면서 아빠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평소보다 더 꼿꼿하게 목을 한껏 세우고 서서 단정한 자세로 노래를 불렀다. 어쩔 때는 리듬에 맞춰 몸을 이리저리 약간씩 흔드는 것도 아빠가 신난 것 같아 보기 좋았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아빠가 저 앞에서 지휘자가 돼야 하는데. 우리 아빠가 더 잘할 텐데.'라고 생각하며 지휘봉으로 연주하는 아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나는 TV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예능이나 짤들은 소소히 챙겨보는 편인데, 드라마는 꼭 전개에 따라 봐야 하고 한번 시작하면 시즌이 끝날 때까지 너무 집중을 하느라 끝나도 잘 헤어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몇 년에 하나 볼까 말 까다. 또 어떤 드라마들은 기사 내용만 읽어도 너무 자극적이라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요즘 알게 된 드라마 <나빌레라>는 예고편만 봐도 쿵쾅거리는 가슴에 시간을 내어 챙겨보기 시작했다. 가족을 위해 헌신했고, 아무도 모르게 숨겨온 꿈이 있었고, 가족들에게 싫은 소리 한번 못하는 착하기만 한 덕출 할아버지를 보면, 일흔을 앞둔 아빠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나는 아빠가 다시, 아니 처음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으면 좋겠다. 뻣뻣하게 굳은 일흔의 할아버지도 일생에 한번 날아오르고 싶어 발레리노가 되는데, 여전히 고운 음색과 절대 음감을 지닌 아빠가 못할게 무어란 말인가.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우연히 집 근처에 오래된 LP판을 파는 곳을 찾게 되어 아빠가 좋아할 만한 앨범들을 몇 개 사서 한국으로 부쳤다. 여름 홍천의 그 카페에서 설레는 눈길로 LP판들을 어루만지던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며, 작게나마 그 눈길이 손길로 가서 닿기를 바랐다. 다음번엔 LP판들을 플레이할 수 있는 전축을 놓아드려야 하겠다. 아니, 전축뿐만 아니라 수업 신청을 해 드려야 할 테다.




한창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뭔가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아빠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게 아빠를 힘들게 한다"는 아빠의 말에 얼큰하게 목이 멘다. "필요한 거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아빠에게 말할 때마다, 나는 얼마나 아빠를 텅 빈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던 걸까. 나의 끊임없는 거절에도 쉬지 않고, 아빠는 그 텅 빈 마음속에서도 계속 사랑을 긷어 올린다. "그래도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게 한 가지는 있다. 새벽마다 주님을 찾을 때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시간을 할애하는 건 너야." 이렇듯, 언제 어디서 넘어져도 나를 품어줄 그 푹신한 울림 덕에 나는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담대함을 얻는다.



아빠는 아빠의 젊음을 바쳐 우리를 키워냈다. 진짜 아버지를 가져보지 못했어도, 아빠는 그 누구보다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어 주셨다. 아빠의 사랑을 경험한 덕분에,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야"라는 하나님의 고백도 두려움 없이 익숙한 음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제 아빠가 나비처럼 날아오르면, 이번엔 내가 아빠의 아빠가 되어 누구보다 든든히 그 뒤를 지킬 테다.




• Soli Deo Gl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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