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승 May 21. 2021

우리, 한숨 자고 만나요.

아무튼 낮잠.


마음 편히 낮잠을 잘 수 있는 날은 일주일에 한 번 있을까 말까지만, '낮잠이나 자볼까'하는 생각만으로도 호사스럽고 기분 좋은 게으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낮잠을 사랑하는 이유는 천성적으로 예민하고 다분히 결과 지향적인 내 성품 가운데, 한낮의 바람이 스며들 틈을 허락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팽팽히 당겨져 있던 활시위를 느슨히 풀어주는 넉넉한 손길과도 같다.


가장 열렬히 낮잠을 숭배했던 때는 처음 미국으로 이민 왔던 고등학교 때다. 생경한 문화, 새로운 언어,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하루 종일 학교에서 꾸역꾸역 삼킨 긴장을 마땅히 어디다 풀 곳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은 방과 후 운동부 연습이다, 클럽활동이다 바쁜 사이 나는 할 수만 있으면 빨리 집으로 돌아와 엄마 뱃속으로 다시 기어 들어가듯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려 낮잠을 잤다. 잠을 잤다기보다 그 깊은 잠은 나를 집어삼키듯 품어 주었다. 어떻게 매일 그렇게 2-3시간씩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는지. 그 잠은 참 죽음 같았다. 그리고 저녁 먹을 즈음 깨어나면 거짓말처럼 다시 태어난 것 같이 가뿐했다. 낮에 학교에서 있었던 힘든 일, 창피한 일, 어려웠던 일들은 기억 저편으로 무뎌져 모든 것이 리셋된 기분이었다.


그렇듯 내 마음의 모든 불안과 혼란들을 잠식시켜주던 낮잠은 엄마가 되고 육아를 하면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학생 때처럼 몇 시간씩 늘어지게 잘 수는 없었지만, 아이가 잘 때 함께 웅크리고 자는 그 20-30분의 쪽잠은 달디 달았다. 아이가 자는 중에 급하게 해치워야 하는 설거지나 전쟁터처럼 널브러진 집안을 종종걸음으로 정리하는 것 대신 함께 자리를 펴고 눕기로 선택할 때마다, 나는 내가 승전용사라도 된 듯 자랑스러웠다. 쌔근쌔근한 아이의 숨소리 앞에 내 코를 갖다 대고 함께 들숨 날숨을 공유하며 자던 그 시절 낮잠의 기억은 삶과 시작과 설레임의 숨결로 남아있다.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불어 넣으셨던 생기란 그런 숨결이었을까. 첫 아담도 분명 낮잠을 자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마흔이 다 되어 저질 체력을 탓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낮잠이 궁하지만, 그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그 어느 시절보다도 짧다. 아이들이 하교하기 전 혹은 라이드를 가기 전 운이 좋으면 10분에서 15분 소파에 기대어, 아니면 파킹장에서 급속 충전 (power nap)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짧은 15분의 힘은 얼마나 큰지, 침을 흘리며 잠깐을 곯아 떨여졌다 깨어나면 피곤과 짜증이 가시고 낮잠의 자애로움이 아직은 남아 있는 얼굴로 아이들에게 파고 들 품을 내어줄 수 있다. 낮잠은 내 사랑을 순간 진심으로 만든다.


이렇게 나에게 보약과도 같은 낮잠은 때로는 내 마음이 얼마나 평온한 상태인지 측량해주는 충실한 다림줄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무리 자고 싶어도 낮잠에 들 수 없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내 마음이 낮잠조차 잘 수 없을 정도로 휘청거리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이 번잡하고 불안할 때마다 잠은 기어코 멀리 달아난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생선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리거나,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는 특히 그러하다. 낮잠을 위해서라도 얼른 용서를 구하거나 용서를 하면, 출렁이던 마음의 추는 어느덧 느긋한 제자리로 돌아와 있다. 낮잠은 내 마음의 상태를 알려주는 날카로운 잣대요, 화해를 향한 손짓이다.


낮잠은 나에게 달콤한 항쟁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매일을 분 단위로 쪼개 사는 버릇이 있는 나에게 "지금은 (스케줄에 없는) 낮잠을 자겠어"라는 결단은 나라는 틀에 대항하는 일종의 결연한 투지다. 그것은, 내가 만든 분주함이 나의 일상을 잠식하지 못하게 하리라는 고집스러운 선언이기도 하다. '해야 할 것 한두 개쯤 못해도 괜찮아'라는 너그러움은 모든 할 일을 마친 내 모습보다 실은 더 마음에 든다. 스스로에게 곁을 주는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늘 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 하루의 정제 과정. 나의 의지를 내려놓는 시간. '지금 잠깐 쉰다고 잘못되는 건 하나도 없어'라며, 나의 통제 욕구를 거스르는 행위.


나는 그렇게 낮잠을 자고 난 후 너그러워지는 내가 좋다. 아이들도 아마 낮잠을 자는 엄마를 더 좋아할 것이다. 매주 목요일은 아이들이 늦게 오는 날이기 때문에, 그나마 잠깐이라도 낮잠을 향한 사치를 더 부려볼 수 있다. 책을 읽다 잠들던지, 잠시 음악을 듣다 잠들던지, 무념무상의 달콤함은 생각만으로도 설레인다. 생각의 겹이 밀풰유처럼 켭켭이 둘러싸인 내게, 낮잠의 여백은 그 비어있음만으로도 숨이 쉬어진다. 무언가를 향해 에너지를 쏟아부을 때의 뾰족한 열정과 갈망도 짜릿함을 주지만, 뭉툭하고 느린 마음으로 비워낼 때의 후련함에는 비할 바 아니다.


제일 좋아하는 낮잠은 비 오는 오후의 낮잠이다. 투둑. 투둑. 내리는 비는 모든 상념들을 차별 없이 잡아 내리고 성스럽고 고요한 진공의 상태를 만들어 준다.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진 느낌이다. 왠지 모를 안도감은 솔솔 잠을 부른다. 그러면 무거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리고 다시 한번 태아의 자세로 몸을 웅크린다. 아늑하고 따뜻하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코끝을 찡하게 했던 말들도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일들도, 잘 개어진 이불처럼 정돈이 돼 있을 것이다.


노곤한 바람이 분다. 우리 오늘은 잠시 할 일을 접어두고. 어여 자자.



• Soli Deo Gloria •

매거진의 이전글 내 아빠의 나빌레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