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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Jun 21. 2021

공통분모가 하나도 없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고정희 시인과의 인터뷰에서 박완서 선생님은 남편분과의 사별에서 비롯된 당신의 감정적 독립에 대한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신다. "그동안의 내 삶이 그만큼 응석을 부리며 살아도 되는 환경이었다는 것 아니겠어요... (어려운 일들은) 모두 남편의 몫이었거든요. 동사무소에 갔다가도 이런 일쯤으로 가슴이 울먹거린다든가 하는 유아기적인 자기 설움이 무척 싫어요. 따지고 보면 남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자기 응석도 일종의 자기 과시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봅니다." (박완서의 말, p. 23) 박완서 선생님의 남편분이 어떤 분이셨는지 알 길은 없지만, 선생님으로 하여금 전쟁의 피폐함과 처녀시절 가장 노릇을 하던 고단함을 잊게 만들고 '응석을 부리며 살아도 되게끔’ 해주신 분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아마, 받아주시는 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천성적인 날카로움과 퍼렇게 날 선 예민함도 소리 없이 꼭 들어맞게 품어주는 칼집처럼.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나에게도 있는 그 "응석받이"의 모습에 못내 가슴이 뜨끔하기도 하다. 때가 어느 때인데 이런 시대착오적이고 의존적인 사고를 하냐고 비판을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런 의존성은 꼭 나약한 성품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처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진 데서 오는 안정감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누가 알까 겁나는 나의 응석받이의 모습은 사실 오직 남편 앞에서만 발휘된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녀가장까지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바쁜 사업으로 인해 동생에게는 엄마의 역할을 해야 했고, 중학교 때 미국에 이민 온 후로는 온 가족을 대표해 울며 겨자 먹기로 나서야 할 일이 많았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의 나이에 안 되는 영어로 부모님 대신 전면에 나서 각종 관공서, 은행, 병원, 학교 등에서 통역관을 자처해야 할 때마다 양손에서는 식은땀이 나고 숨고만 싶었다. 그 이후로도 모든 것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긴장감의 연속 가운데, 나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나를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 줄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찾았던 것 같다.


그렇게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살던 나에게 남편과의 만남은 표류 중에 만난 어떤 섬이었다. 그것은 외딴섬인 줄로만 알았는데 육지로 이어진 반도. 그 반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교류적 삶이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 가는 거고, 결국은 혼자서 뭐든지 잘해야 내야 한다'라는 고립감과 함께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좀처럼 힘든 내색을 안 했던 나는, 남편에게만은 유일하게 "아무것도 못해도 괜찮은 사람"이 된다. 내가 남편 앞에서 맘 놓고 아무것도 못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이유는 이미 그가 나를 나보다 더 크게 봐주기 때문이다. 평생 부족하다고 강박증처럼 스스로를 몰아치는 나에게, 그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나는 아무것도 안될 것 같다고 말할 때, 너는 뭐든지 될 수 있지만 있는 그대로도 역시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가 나에게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사람'이 되는 동안 나는 그의 앞에서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된다.




남편을 처음 만난 자리는 (아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편의 소개팅 자리가 펑크가 나서 내가 대타로 나가게 된 자리였다. 처음 본 그의 인상은, 한국에서 정말 찾아보기 힘든 Mohawk 스타일 (한마디로 닭벼슬 머리죠)에, 귀걸이는 하지 않았지만 귀 뚫은 구멍은 나보다 개수가 많았고, 조금 삐딱-하게 앉아있는 폼 (혹은 '꼬락서니')이, '응, 내가 얘를 만날 일은 없겠구나.' 했던 남자였다. 평생을 자타 공인 범생의 길만을 걸으며 앞에서 기타 치는 교회 오빠 스타일의 남자나 곰돌이 푸우같이 동글동글한 남자들만을 좋아했던 나에게 이 귀 뚫은 닭벼슬이 왔다는 건 좀 문화충격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시작부터 달랐다. 그는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마음이 건강했고,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솔직하고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딸만 둘 있는 집에 자라서 엄마 아빠의 끊임없는 보호로 어찌 보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온 나와는 달리, 열아홉의 나이에 비행기 티켓과 부모님이 주신 단돈 300불을 가지고 미국에 온 그는 그야말로 사하라 사막에 던져놔도 살아남을 서바이버가 따로 없었다. 발레파킹 서비스부터, 가게 청소일, 카페 서빙, 바리스타, 등등 정말 다양하고 궂은일들을 하며 삶의 경험들을 쌓았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지난 시절에 대해 창피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늘 에너지가 넘쳤고 삶에 대한 기쁨이 있었다. 내가 듣도 보도 못한 곳에서 경험한 많은 일들이 그에게는 모두 자산이자 자존감의 원천이었다.


그에게 유난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의 처한 상황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들 많음)에 상관없이 세상이나 타인에 대한 원망이 없었고 그 무엇보다도 자기 연민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체로 자기 연민이 없는 사람은 자격지심이 없고, 그것은 관계를 몹시 매우 건강하게 만든다). 왠지 센 척을 하거나,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거나, 내 앞에서 뭔가를 계속 증명해내려던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모든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했다. 한창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던 시기. 도대체 이 남자는 언제 나보고 사귀자고 할 것인가 나름 애가 타는 상황에서,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나는 너와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유의미해. 내가 지금 당장 너에게 내 여자 친구가 되어 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난 우리가 서로의 밑바닥까지 다 알고 나서 그 후의 선택은 네가 하게 해주고 싶어." (이 말에 난 이미 혼자 결혼식장 입장했음). 자신을 부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밑바닥까지 보여줘도 '나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는 그의 자존감은 나로 하여금 '이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다'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는 아직 가진 것 하나 없는 학생 신분이었고, 어린 우리가 결혼을 하기엔 너무나 많은 현실적인 장애물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라는 나의 본능적 직감 하나 믿고 그 닭벼슬을 처음 만난 지 1년 만에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이 대학원생 2년 차일 때 결혼을 하고 물가 비싼 샌프란시스코에서 신혼생활을 할 시절. 둘 다 변변한 수입이 없었는지라 살림은 쪼들렸지만 남편의 초긍정적인 성품 덕에 소꿉장난하듯 재미있게 살 수 있었다. 내 눈에는 늘 반짝반짝 빛나 보이던 Whole Foods Market (유기농 위주로 꽤 비싼 식료품을 파는 마켓)까지 남편과 둘이 걸어가 심사숙고해 고른 치즈케이크 한 조각을 사 오며, '나도 이곳에서 마음껏 장 볼 날이 올까?'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도 마냥 아이 같았던 우리 둘은 나눠먹는 케이크 한 조각만으로, 손을 잡고 걸어 오르는 동네 산책길 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신혼살림을 새로 들이기는커녕 남편의 선배가 귀국하면서 주고 간 낡디 낡은 냄비 세트에 밥을 해 먹어도 재미졌다. 결혼을 하기 전 남편이 "우리 Food Stamp를 받아야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라고 물어봤을 때, 푸드스탬프가 뭔지 잘 몰랐던 (짐작도 못했던) 나는 아주 해맑게 그러마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푸드스탬프란 건 저소득 가정이 굶주림과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도록 식품과 교환할 수 있는 쿠폰을 제공하는 주 정부의 혜택 프로그램이었다. 실제로 푸드스탬프를 받게 되진 않았지만, 그 정도로 삶이 어떤 커브볼을 던져도 맞닦트릴 자세가 돼있다는 게 못내 존경스러웠다. 모든 게 다 갖춰진 상태로 시작했다면 절대 얻지 못했을 우리의 추억이자 마음의 재산.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다는 마음의 근육을 형성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12년을 살아도, 사실 우리는 여전히 무척이나 다르다. 그는 동적이고 난 정적이다. 그는 한시도 가만있질 않는 운동중독 수준이고, 난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하루 종일 책만 보래도 볼 수 있다. 그는 일단 빨리 결정하고 행동하며 실행 중간중간 수정해나가는 행동파인 반면, 나는 확실한 플랜이 없으면 시작이 어렵고 생각도 많은 사색 파이다. 이렇듯 우린 삶의 패턴도, 기질도, 취미도 다르고, 개그코드도 다르고 (이것은 실로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물건의 취향과 각자 살아온 히스토리, 일의 결과까지 이르는 과정, 육아와 훈육의 방식, 스트레스 푸는 방법 등 많은 것들이 참 다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12년을 무사히 살아온 게 기적 같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다른 우리가 일상 속 여러 가지 상황들이 닥쳤을 때, 서로 텔레파시가 통한 것처럼 같은 타이밍에 같은 말을 하는 찌찌뽕의 순간들이 아주 자주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는 늘 더워하지만 나는 늘 추워하니 말없이 창문을 닫아준다. 나는 운동선수들에 관심이 1도 없지만, 그가 좋아하니 농구 선수들의 이름을 줄줄이 알고 풋볼 경기를 함께 본다. 우리의 다름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




나와 결혼하고 나서 그는 내 꿈을 이뤄주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는 미국의 동부, 보스턴에 와주었다. 지금도 그렇다. 삶의 방향성을 잃고 힘들어하던 올해 초, "나.. 글 한번 써볼까?"라는 한마디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날 격려해 주었다. 걱정과 두려움이 많아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영역들을, 행동대장인 그는 날 대신해서 늘 한 발짝 먼저 내디뎌 준다. 그로 인해 내 삶의 모든 지평은 넓어지고, 그는 내 비상하는 날개 아래 부는 바람이 되어준다.


남편과 함께 걷다 길을 잃어 들어선 골목길

며칠 전 아주 오랜만에 남편과 둘이서만 보스턴 시내를 거닐 시간이 생겼다. 처음 가보는 레스토랑에서 처음 먹어보는 메뉴를 먹고, 정처 없이 거닐다 길을 잃어 처음 본 낯선 길에 들어섰다. 내비게이션과 구글맵 없이는 절대 어디도 가지 않는 내가, 남편의 손을 잡으면 그 어디라도 두렵지 않다. 길을 잃을수록 좋다. 길을 잃어도 좋다는 건 어차피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음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느슨히 손을 잡고 걷는 삶의 길 위에서. 매일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 서로를 애달피 여기며 살 수는 있지 않을까 소망해본다.

길을 잃어 좋은 우리



• Soli Deo Gl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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