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를 물고
종종 한국어의 정확한 의미를 떠올리지 않은채 감으로 사용할 때가 있다.
향연이라는 단어가 그랬다.
서울국제도서전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스는 바로 출판사 '나무생각'의 파란 문장 벽이었다.
파란 종이에 빼곡한 문장들
그 중에서도
단언한건대 예민함은 재능이다.
시간의 위협에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를 읽고 든 생각은
아! 문장의 향연이로구나
며칠 전 비슷한 감정이 든 적이 있었다.
아래 책을 우연히 짚어들고
내 안의 고귀한 자신 이라는 표현을 만났을 때
평소의 자신이 아닌 좀 더 맑고 고귀한 자기 자신
우리는 모두 안다.
자신이 유독 빛나던 순간과 어두운 순간을
고귀한 자기 자신을 아는 그 찰나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단 세 줄, 문장의 향연이었다.
이 글을 읽고 다른 책이 떠올랐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 (이따금 놀라며)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이 문단에서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쯤되니 향연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알고 아름다운 문장을 만날 때마다 계속 사용하고 싶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향연의 단어 뜻은 다음과 같다.
향연(명사)
1. 특별히 융숭하게 손님을 대접하는 잔치
2. 책명 플라톤의 전기(前期) 저작의 하나.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그리스의 일류 문화인들이 한곳에 모여 사랑을 여러 가지관점에서 이야기한 대화편.
단어의 정확한 뜻을 찾아본 후 조금 놀랐다. 잔치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좀 더 고상한, 궁중의 무희가 펼쳐지는 아름다움만 추상적으로 떠올렸다.
단어의 뜻을 알고 나니 재미있는 건
문장의 향연 이라는 표현을 강하게 떠올린 곳이 바로
독자를 손님으로 융숭하게 대접하는 잔치, 서울국제도서전이었다.
저 파란 종이 속 문장들이 나를 손님으로 특별히 융숭하게 대접해주었구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 Lewis
브런치의 슬로건으로 처음 만난 이 문장을 참 좋아한다.
첫 글을 쓸 용기를 주었다.
국제도서전에서 만난 브런치 부스와 아시아 독립출판 싱가포르 부스는
문장의 향연이 앞으로도 끝없이 꼬리를 물고 펼쳐질 거라는 걸
닫히지 않고 경계 없이 온라인과 해외에서도 펼쳐질 거란 걸
상상하게 해주었다.
내 글도 싱가포르까지 닿는 날이 올까?
생각보다 쉽게 빠르게 갑자기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잠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