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처럼 혹은 바다처럼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다 잠시 뒤를 돌아봤다. 앞에서 크게 일렁이는 파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같은 걸 바라보는 호수의 눈에서 아주 잠깐 주저함이 스쳤다.
하나는 잠시 기다려야 할지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호수라면 금방 자신의 뒤에서 걸음을 맞춰 줄 것이란 믿음이 마음속에 조용히 차올랐다.
하나는 슬쩍 웃으며 다시 걸었다. 몸 형태에 맞게 닿아오는 바닷물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좀 더 물의 결을 느끼며 걷고 싶어졌다.
눈을 살풋이 감자, 닿자마자 따뜻함으로 변하는 물의 촉감이 뭉글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앞과는 다른 방향에서 출렁이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미소지었다.
한 발, 또 한 발, 주위로 밀려오는 파도와 그 소리로 호수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10걸음.
7걸음.
5걸음.
3걸음.
늘 호수는 하나가 불편하지 않도록, 하지만 언제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딱, 세 걸음 뒤에서 보폭을 맞춰 주던 아이다.
”같이 가“
옆으로 와 손을 잡은 호수를 보았다. 두 눈빛이 닿았다. 파도가 두 사람 사이를 감쌌다.
마치 태풍의 눈 속에 들어온 것처럼.
하나는 가만히 호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빨려 들어갈 듯 깊었던 눈빛. 그때는 헤어나올 방법을 몰라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손이 닿은 지금 이 순간. 알 것 같다.
그 소용돌이는 벗어날 것이 아니었다. 올라타야 했구나. 휩쓸려야 했다. 가만히 느껴야 내가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나는 잡은 손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물살에 달라붙은 호수의 머리카락을 걷어
가려진 눈을 다시 마주 보았다.
”누구랑 싸우면서 왔어?“
”응, 근데 내가 이겼어.”
“ 잘했어!”
잡은 손을 놓치지 않으려 더 가까이 걸었다. 남은 한 손으로 파도를 헤치며 둘은 모래사장으로 빠져나와 그대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기분 좋다. 상쾌해.”
그 말을 내뱉으며 바라본 호수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제야 하나가 아는 호수의 호흡이었다. 일렁임이 잦아든 평온한 얼굴.
그 옆에서 하나도 조용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맞지 않았다.
호수의 호흡은 하나보다 느렸다.
아, 이렇게 숨을 쉬는구나.
조금씩 속도를 맞추자
둘 사이에 리듬이 생겼다.
심장 박동처럼
하나씩, 천천히 이어졌다.
등 뒤로 닿는 모래의 따뜻함,
시원하게 말려주는 바람,
옆에서 들려오는 호수의 숨소리.
하나는 이 편안함 속으로
잠겨들 것만 같았다.
“엄마가 예전에 해준 말이 있어”
희미하게 안개처럼 덮인 공간 속에서 호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대답대신 살짝 고개를 호수쪽으로 돌렸다. 감긴 눈안에서 호수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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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는 슬쩍 하나를 보았다. 고개는 자신을 향해 있었고
눈이 감겨있었다. 속눈썹이 꽤 길었다.
역시 강아지 같아.
호수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주 어릴 때, 아빠 몰래 엄마 방에 들어갔어.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서. 그냥... 엄마 자는 얼굴만 살짝 보고 나오려고 했는데.”
호수는 눈을 감고 머리카락 사이에 스쳐가는 바람을 기다렸다.
“엄마가 창밖을 보고 있었어. 깜짝 놀랐는데 너무 기뻤어. 엄마가 깨어 있었으니까. 엄마랑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구나. ‘호수야’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구나. ”
파도소리가 말과 말 사이에 스며들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호수야, 이리와’ 그 말에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어. 잘 참은 줄 알았는데. 서운했어. 그동안 이렇게 볼 수 있었는데 못보게 한 아빠도 밉고. 오랜만에 이름을 불러주는 엄마도 밉고.”
하나의 잠든 숨소리가
고요하게 이어졌다.
호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나를 안아주면서 말했어. 우리 애기가 엄마가 이렇게 미워서 어떡하나. 엄마가 너무 미안하네. ”
...
“호수야. 엄마 봐봐. ... 아이구 이뻐라. 누구 똥강아지가 이렇게 잘생겼대”
“엄마 미워”
“그래 .엄마도 엄마가 미워. 우리 똥강아지 두고 ... 엄마도, 엄마 너무 미워”
“...”
"그러니까 호수야.
그 미워하는 마음까지 다 엄마 탓으로 돌려.
그리고 우리 애기는, 품고 사는 사람이 돼.
꽃도, 나무도, 새도.
외롭지 않게."
엄마는 아주 소중해 닿기 조차 어려운 듯 호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호수 말고... 산처럼 살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