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옮겨심기

코스모스 군락

by 박지선

제법 옷깃을 여며야 할 만큼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하나의 집으로 가는 들녘에는 이제 빨간 연어알이 있던 자리에

하얗고 수줍은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다.


노을이 기울기 시작한 오후, 맑은 하늘을 통과한 햇살이

코스모스 위에 투명하게 내려앉았다.


빛을 품은 꽃들이 서로의 어깨를 스치며

바람에 맞춰 천천히 흔들렸다.


마치, 왈츠를 추듯.


코스모스 군락을 지나며

어쩐지 설레는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던 중,

시선이 문득 멈췄다.

군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하얀 코스모스 한 송이가

온전히 빛을 받으며 쉬고 있었다.


혼자 흔들리며 빛을 피하는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하얀 꽃잎은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호수는 옆에서 손에 쥘 만한 돌을 찾았다.

두 걸음 옆에 주먹만 한 돌이 하나 있었다.

돌을 집어 코스모스가 심어진 부근의 흙을 살살 파냈다.


흙은 말라 있었고 땅을 파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호수는 멈추지 않았다.


이내 뿌리가 보이기 시작하자

호수는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조금 더 빠르게, 그러나 여전히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냈다.


뿌리를 다치지 않게 코스모스를 들어 올렸을 때,

그 꽃의 진짜 모습을 본 것 같았다.

겉으로 보이던 것보다

훨씬 더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래서 바람에도 꼿꼿이 버틸 수 있었구나.

혼자 여기까지 어떻게 날아왔을까.

피해 온 걸까, 아니면 헤어지게 된 걸까.


호수는 꽃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외로움에 익숙해진 듯 조용히 빛나는 모습이었다.


이내 호수는 지나쳐 온 코스모스 군락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가장 밝아 보이는 분홍색 코스모스 옆에 흙을 파냈다.

아까보다 흙이 무른 자리라 퍼내기는 훨씬 수월했지만,

코스모스를 옮겨 심기에는 이전보다 더 깊고 넓게 파야 했다.


호수는 이 아이의 앞으로를 생각하며

조금 더 깊게, 조금 더 넓게 흙을 파냈다.

그 사이 하늘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돌을 내려놓고 꽃을 들어

얼추 파낸 구덩이의 깊이를 가늠해 보았다.

이 깊이라면,

코스모스의 뿌리를 충분히 감싸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이 아이를 지켜줄 수 있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새로운 친구들 옆에서

이 아이가 지낼 시간을 떠올리며

호수는 살살 흙을 덮어 주었다.


내일 해가 다시 비칠 때,

이 아이가 어떻게 빛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호수는 내일 오전에 다시 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쉽게 떼어지지 않는 시선을 간신히 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나의 집에 도착하자

어느새 주위로 어둠이 몰려들어 있었다.


현관이 보이자 호수는 걸음을 조금 더 재촉했다.

그때, 문 앞에 쌓여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는 택배 상자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훨씬 큰 상자들이 여러 개, 문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파란 상자들도

접힌 채로 테라스 구석에 기대어 있었다.


수많은 박스를 어디에 쓰려는 걸까 생각하며

현관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그때, 안에서 하나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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