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시선

애정의 상대적 무력

by 박지선

다시 들어도 엄마의 말은 같았다.


"이제 너 고등학생이야. 여기서만 살기엔 엄마가 너한테 보여준 세상이 너무 작아."

"난 이 세상이 좋아."

"하나야."

"엄마, 나 이사 가기 싫어."


커피잔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하나야, 넌 꿈이 뭐야."


꿈. 낯설게 다가오는 단어.

잠잘 때 꾸는 꿈 말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불려지는 꿈은

나와는 상관없는 말처럼 들렸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이. 이사 가기 싫다니까."

"하나야."


진지하게 불러오는 엄마 목소리에

괜히 몸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해야 할걸 하지 않고 실컷 놀다

늦게 집에 들어왔을 때

엄마를 마주친 기분이었다.


"왜."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하나는 괜히 식탁 의자 손잡이를 검지로 힘을 주어 문질렀다.


"엄마는 말이야, 너를 낳고 아빠랑 이 시골에서 오순도순 사는 거, 그게 행복이었어.

그건 절대 후회하지 않아."


엄마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치 다음 말을 고르기보다, 그 말을 할 자리를 마음속에서 찾는 사람처럼.


"근데 말이야. 살다 보니까 문득 드는 생각이 있더라.

그 생각이 가끔은 바람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비처럼 내리기도 하고."


하나는 엄마의 말을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엄마는 당차고, 밝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끔, 식탁에 앉아 한참을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 엄마는 손잡이를 잡고도 입에 대지 않았다.

모락모락 올라오던 김은 점점 옅어지다 어느새 사라졌다.

그럴수록 엄마는 더 깊은 어딘가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생각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다 식은 커피를

미련 없이 싱크대에 버렸다.


그래서 하나는 알고 있었다.

이 결정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오래 생각한 끝에 도달한 결론일 테고,

그 결론을 위해 엄마는 이미 미련 없이

무언가를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 단호함이

하나는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단호함이

하나를 더 꼼짝 못 하게 했다.


어떤 말도,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사 박스는 가득 쌓여 있었고,

엄마는 커다란 봉투에

버릴 짐을 하나씩 담고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었다.


엄마는 이미 행동으로 여러 번 말을 했다.


하나는 그저 그 무력한 말로나마

가고 있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아직 생각이 스며들 틈이 있다면,

그 틈이라도 파고들고 싶었다.


엄마의 입술 끝에서는

더 이상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하나를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으로 엄마는 이미 모든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눈빛 안에

그 누구보다 하나를 위한 선택이 담겨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하나는 더 이상 말을 뱉을 수 없었다.


터져 나오려는 무언가를 막기 위해

처음에는 주먹을 꽉 쥐었고,

그다음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도 엄마의 눈은

하나를 향한 애정을 멈추지 않았다.


"엄마 미워."


눈을 보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하나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하지만 눈은, 세게 감을수록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었다.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

하나는 도망쳤다.


그리고 그 끝에서,

하나의 눈물의 이유 중 하나가 되어버린 아이가

그 자리에 서서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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