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범람

미안하다는 말

by 박지선

닫힌 문 앞에서


호수의 마음이

너울 쳤다.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이 시간에, 이 날씨에

땀에 젖은 채 서 있는 나를 보면

깜짝 놀랄까.


아니면


여전히

비겁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어버릴까.


문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만으로


이미 하나의 마음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초침이


하나, 둘


넘어가는 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침을

꼴깍 삼켜도


초조함은

가라앉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 옆

창문 틈으로 보이는 현관에도

불빛 하나

켜지지 않았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무언가 있기를 바랐지만


끝내

아무것도 없었다.


턱밑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무겁게

흘러내리는 모래를 딛듯

발끝을

천천히 돌렸다.


그 한 걸음이 이상하게도

너무 무거웠다.


지금까지는 버티는 일쯤

당연한 줄 알았다.


버티고,

견디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쯤은

늘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 이렇게까지 가라앉으니

단 한 발도 쉽지 않았다.


걷고

또 걷고.


고개를 떨군 채

눈앞의 땅이

울렁이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발을 디딜수록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버텨야 하는데

자꾸만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때


"호수야."


걸음을 붙잡는 소리.


너무 또렷해서

피할 수가 없었다.


"호수야."


낯선데

익숙한 목소리.


"호수야, 잠깐 멈춰봐."


걸음을 멈추는 순간

눈앞에

초록이 스며들었다.


아.


그 시작이

여기였구나.


하나에게서 느끼던 초록은

이곳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안에는

갈색의

포근함이 함께 있었다.


잡힌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그 온기가

무너지지 않으려

버티던 것들을

조금씩

풀어냈다.


숨이

자꾸만 흔들렸다.


기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더 서러워서.


"호수야… 아줌마가 미안해."


미안하다.


그 말이


이렇게

따뜻할 수도 있다는 걸


호수는

처음 알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걸.


그리고


그 안에

사랑이 들어 있다는 걸.


"…이제

늦은 것 같아요."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제가… 비겁해서."


그 뒤로는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눈물이

쉬웠다.


내가 틀린 것 같아서.


계속

혼자였던 것 같아서.


그 순간

작은 호수가

안에서부터

흔들렸다.


단단하다고 믿었던 바닥이

울리듯 무너지고


파동이

아무렇게나

번져나갔다.


"죄송해요… 제가…"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 순간

막고 있던 무언가가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오르던 것들이

꺼낼 틈도 없이

쏟아졌다.


눌러두고

모른 척했던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다였다.


버텨왔던 것들,

참아왔던 것들,


이름 붙일 수 없던 것들이


뒤섞인 채


호수를

휩쓸었다.


모든 것에

서툴렀던 아이는


그 혼란을


끝내

다 말하지 못했다.


그저

"죄송해요."

그 말 하나로

흘러나왔다.


무엇이

죄송한지도 모른 채.


"호수야, 호수야.

아줌마 봐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잡힌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이상하게

놓아지지 않았다.


그 따뜻함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더

무너질 것 같아서.


"호수야, 죄송해하지 마.

아줌마가 미안해.

어른들이 미안해."


미숙은

계속해서

호수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손이

젖어 있다는 걸

호수는

뒤늦게 알았다.


눈물에 젖은 소리.


어딘가

너무

익숙한 울림이었다.


고개를 드는 게

쉽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무너질 것 같아서.


그런데도

보고 싶었다.


미숙의 얼굴을.


흔들리는 시야를

겨우 붙잡고

간신히

올려다봤다.


눈가에 맺힌

작은 물기들이

빛나고 있었다.


"아가."


그 한마디가

너무 오래

비어 있었던 자리로

천천히

들어왔다.


그리움이

한 번에

쏟아졌다.


그제야

지키고 싶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마음 깊숙한 곳에

아슬하게 쌓아둔

모래성 위에

가장 예쁜

조개껍데기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아가, 울지 마.

그리고…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숙이 호수를 안았다.


그 말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을까.


가슴 안쪽이

조용히 풀려내렸다.


엄마도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걸

삼켜냈을까.


그때의 눈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던 걸까.


사랑한다는 말로는

다 담지 못해서


끝내

미안하다는 말로

건네야 했던 마음.


그 무게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호수의 숨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호수야,

이제 아줌마 봐봐."


잠시 망설이다

호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호수야,

하나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 어딘지 알아?"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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