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끝
해변에 먼저 도착한 건 호수였다. 바다는 호수가 이 마을에 이사 온 뒤 가장 좋아하게 된 장소였다.
조금이라도 멀리 나가려면 자전거를 타야 했고, 마을 사람들끼리는 같은 동네에 살아도 다소 거리를 두는 듯한 분위기였다. 버석한 모래사장 위에 지어진 듯한 이 마을은 호수 아버지의 고향이었다.
멀리 수평선에 시선을 두면, 그 너머 어딘가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호수는 자주 이곳을 찾는다. 끈적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밀려온 생각 하나가 마음에 잔잔히 파도를 친다.
그날 이후, 지난번 만난 아이와는 동네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말 한마디 걸 틈도 없이, 아이는 스멀스멀 다가왔던 길을 달아나듯 사라졌다. 남은 건, 그 아이가 지나간 자리에 잠시 머물렀던 초록빛의 온기.
그 온기를 떠올리자, 호수는 아주 작고 조용한 호기심이 생겼다.
오늘은 유난히 파도 소리가 세차게 들려왔다. 밀고 쓸어가는 규칙적인 소리 사이로,
불협처럼 섞인 저항의 기척이 있었다. 호수는 유난히 바람이 세차다 여기며 다른 생각으로 손쉽게 넘겨버렸다.
발끝을 보던 생각의 시선은 저 멀리 모래사장에 벗어둔 신발 한 켤레로 이어졌다.
그제야 파도가 옅게 갈라지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하나였다.
***
바다에서 한 달음에 집으로 도망쳐 온 날 이후, 하나는 자신의 루틴을 일주일째 지키지 못했다.
매일 언덕 위에 누워 무언가를 관찰하다가, 그저 터덜거리며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바다로 가는 길은, 하나에게는 거센 태풍의 물을 헤쳐 나가는 것만큼 낯설고 위험한 길이 되었다.
그날, 그 남색 바다 앞에 있던 아이는 누구였을까.
사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다. 강씨 아저씨네 아들. 이 깡촌에 몇 년만에 새로 이사 온 그 집.
강씨 아저씨가 누군지, 직접 만난 적은 없다. 다만, 사흘 전 저녁.
부모님이 식탁 너머로 나눈 대화 속에 등장했을 뿐이다.
“혹시 마주치면 잘해줘라.”
대화 끝에 아버지가 덧붙인 말. 동갑이라고 했던 것 같다.
이 동네에 살며 처음으로 생긴 또래의 남자아이.
또래 남자아이에게 잘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처음은 언제나 낯설고 어렵다.
그것보다 내가 궁금한 건,
그 아이는 어떻게 그 바다를 알고 찾아왔을까.
하나는 안다. 그 바다는 이 마을 사람 그 누구도 가지 않는 해변이라는 걸.
그래서 3년 내내 아주 자유롭게 그곳을 비밀 아지트로 삼았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기만의 유토피아처럼 지내왔는데.
생전 처음 본 남자아이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듯 그곳에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던 그 아이의 눈빛. 한정없는 바다의 모든 물을 단숨에 삼켜버릴 듯 했다.
그 눈에 잠긴 물이 다시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듯한 공포감.
하나는 뒤돌아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처음 보는 눈빛에 기가 죽어버렸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하나는 잃어버린 자신의 루틴을 되찾기 위해, 다른 루틴을 깨버렸다.
언덕이 아닌, 바다로 곧장 달려온 것. 정확히 6일 하고도 21시간 만이었다.
잠시 헷갈렸지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열 걸음을 남겨두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 삼.. 이.. 일,영,땡! '
너무 빨랐다. 셈을 끝내기도 전에, 눈이 먼저 열렸다. 숨을 참았어야 했는데. 참을 수 없었다.
이곳은 원래 나의 자리였다. 놀이터이자, 숨 쉴 공간이자 친구와의 약속 같은 공간. 이렇게 빼앗길 순 없다.
굴러들어온, 아니. 하늘에서 벼락처럼 떨어졌다고 해도. 내 자리는 내가 지켜야지.
혹시—오늘도 그 아이가 있다면, 오늘은 절대로 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해변엔 파도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이곳이 얼마나 비어 있는지 알려줬다.
감았던 눈에 들어갔던 힘이 허무하게 빠져나갔다. 하나는 터덜터덜 해변을 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 아이도, 그날 이후 이곳에 오지 않았던 걸까.
바다는 여전히 그 바다였다. 익숙한 풍경 위로, 어딘가 낯선 기운이 포개졌다.
하나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바다 앞에 우뚝 서있던 남자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 갈증난 눈빛이 떠오르자, 하나는 번쩍 눈을 떴다.
'정신 차려야 해.'
슬리퍼를 휙 벗어둔 채, 하나는 바다로 달려들었다. 차가운 물이 발목에 닿고,
곧 풍덩—
물보라가 튀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물이 하나의 가슴께를 부드럽다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