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의 글 쓰는 인간

6월 30일의 단상

by 영화로운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무제 노트를 사 와서 책상에 앉아 생각나는 아무거나 써내는 것이 즐거웠고, 미래를 위한 다짐과 불안한 마음을 빼곡한 글씨로 정리해내기도 했다. 글로 마음을 전하는 것에 가장 진심이어서 읽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고 행복하게 해주기도 했다. 글로 써내야 하는 대학 과제가 있으면 페이지 수 줄이지 못해 아쉬웠지 빈 창만 멍하니 보고 있던 적은 없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서는 그 모든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한국어든 영어든 업무 이메일 쓰는 것은 쉽고도 즐거운 일이었고, 비교적 좋은 결과를 얻어냈다. 누구보다 뛰어나다거나, 대단한 필력은 아니었지만 글쓰기를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은 일상 속 나만의 자부심이었다. 그랬다.


그런데.
GPT가 나타났다.


지피티야,
내가 좀 어려운 이메일을 써야 하는데 말이지 도움을 줘. 담당자인 내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서 말을 꺼내기 좀 곤란한데, 회사 입장에서는 수익률을 고려해서 이번 계약이 끝나면 계약을 종료하려고 해서 의사를 밝혀야 해.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러이러한 이유가 있어. 이 내용을 오피셜 하지만 공손한 톤으로 작성해 줘.

친구한테 고민 상담하듯 포인트만 집어주면 아주 적절한 톤 앤 매너, 완벽한 어휘력으로 3초 만에 어려운 이메일 한 편 뚝딱 작성해 내는 이 시대 최고의 작가, GPT.


이 내용을 영어로 작성해 줘.

라는 문장 하나만 붙이면 원어민 뺨치는 이메일도 완성.


이 문장은 좀 더 강한 어조를 사용해 줘.

하면 내 뇌 속 시냅스가 "강한 어조"에 해당하는 어휘 사전 뉴런에 닿기도 전에 마법 같은 표현으로 변신한다. 그 속도를 이런 표현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어... 그... 단어 뭐였지... 하는 사이에, 이 단어 맞죠? 하고 뚝딱.


지피티야,
이번 프로모션은 기간한정 혜택이 있는 시즈널 프로모션이야. 이번 여름 해외여행 가는 2030 타깃이고, 대표 상품은 이 상품이야. 무려 50% 할인하고 있어. 이번 주말에 보낼 앱푸시 문구를 작성해 줘. 각 30자 넘지 않는 문구로 부탁해. 이모지도 필수야.

카피라이터가 이젠 필요 없다. 이모지 앞에 붙일지 뒤에 붙일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한 방에 만들어주니까. AI니까 감성터치는 불가하지 않을까? 하면 그것도 오산이다.


인스타그램 감성 문구 스타일로도 드릴 수 있어요. 만들어드릴까요?

오! 그래, 그것도 가져오라! 하면 이것도 뚝딱!


바야흐로 콩떡같이 던져도... 아니, 콩도 던지고 팥도 던지고 돌도 섞어 던져도 윤기 좔좔 새하얀 찰떡이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소꿉친구한테 말하듯 대충 집어넣어도 수려한 문구의 결괏값이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결괏값. 그래 결괏값. 글 한 편이 결괏값이 된 시대가 되었다. 문구점 앞 뽑기같이, 동전 넣어 끼릭끼릭 돌리면 퐁 튀어나오는 결괏값. 함수나 프로그래밍 용어로나 듣던 결괏값.


한 시간, 두 시간, 밤샘 시간 쏟아, 머릿속 한 판 뒤집어엎고, 내 새끼 같은 글 한 편 태어나던 시대가 가버린 걸까.




물론, 업무에서는 AI의 활용이 반갑다.

어려운 영문 이메일이라도 쓰려고 치면 1시간은 걸렸을 텐데, 5분 만에 좋은 결괏값 받아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대사가 있다. 드라마 더글로리의 박연진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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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내가 안 쓰는 거야. 너한테 월급 주면 이렇게 나오는데, 내가 쓰면 거지같이 나오니까. 여권 있니? 만들어. 이번 휴가 때 가고 싶은 나라 정해서 오고. 원고 좋다. 푼돈으로 내가 지금 쟤 하늘이 됐어.


오늘도 효율적인 GPT와의 하루! 를 외치며 퇴근한 후. 노트북 앞에 앉은 나는 한동안 브런치의 새하얀 빈 창을 보고 있었다. 더 이상 인간의 글쓰기가 의미가 있나? 아니, 나의 글쓰기가 의미가 있나? 내가 쓴 글보다 AI 글이 더 좋은데. 그걸 인정해 버린 나는 한 동안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접한 소문으로는 죽은 인터넷 이론도 있었다. 인터넷상의 글도, 댓글도 다 AI끼리 주고받고 있는 것이라는 괴담. 반 이상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버섯 키워드로 00 버섯의 효능, 요리 방법까지 나와 있는 블로그 글이 수두룩 하다는 또 다른 괴담을 듣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괴소문과 영혼 없는 키워드만 가득한 글이 산처럼 쌓여있는 가운데.


마음이 있었다. 글을 써 내려가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글로 남기고 싶은 마음속 덩어리가 있었다. 그 덩어리가 화산처럼 분화하던 날에 나는 오랜만에 글을 썼다.


이 전에 쓴 할머니의 까만 개 이야기였다. 글을 쓰는 과정은 나 혼자만의 장례식 같았다. 이 이야기를 먼저 할까, 이 단어를 써볼까, 짧은 글이었지만 나는 꽤 오랜시간 차근차근 고민했다. 떠오르는 기억을 예쁘게 정리해 작은 상자에 담는 과정이었다.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너를 기억하겠다고, 인사를 하는 기분이었다. 써 내려가기 전에는 몰랐을 슬픔이 있었다.


지피티야, 내 마음 좀 알아줘. 내 마음을 글로 써줘. 내 마음을 정리해 줘. 라고 주는 프롬프트의 결괏값이 내가 내 마음 들여다보며 써 내려가는 과정보다 나을 수 있을까? 어쩌면 한 인간의 속은 바다보다 깊고 넓은 데다가 쉴 새 없이 변덕이어서 글로 바꿔달래도 못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형체가 없는 나의 무엇을 글로 옮기는 과정은 태풍이 치는 바다와 같았다. 태풍이 치면 바다는 강한 바람과 파도로 온통 뒤섞인다. 그렇게 심해의 깊은 물이 표면으로 올라와 영양분을 공급하며, 바다는 숨을 쉬게 된다고 했다. 글을 써내려가는 과정은 그랬다. 머릿속이며 마음속이며 온통 뒤집어엎고, 글 한 편에 담아 잔잔하게 정리하고 나면 편안해지는.


감성이 뭔지 1도 모르는 AI가 감성적인 문구를 담아내는 시대에,

글을 계속해서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마음이 있었다.

그런 마음이 나에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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