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 1
사진도 없이 텍스트만 쓰는 일상 기록.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것은 뇌가 반복되는 시간을 한 뭉텅이로 단순화시켜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기억도 시간도 훨훨 날아가버리는 것 같아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일상 누적 프로젝트 시작.
봄이다. 차로 출퇴근 하는 매일 아침마다 팝콘이 톡톡 터지는 벚나무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 봄. 나이가 많이 들어도 이때쯤이면 새내기 시절 스무 살처럼, 달큰한 그 시절의 스물다섯 살처럼 설렐까. 이맘때쯤이면 그때 그 시간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스무 살의 나도 있고, 스물다섯 살의 나도 있고, 서른의 나도, 서른다섯의 나도 있다.
기름값이 비싸져서일까, 아님 나라에서 5부제를 시행해서일까, 요즘 들어 출퇴근 시간이 많이 짧아졌다. 막히는 구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짧아졌다. 내가 운전을 잘하게 되어서일까? 그런 착각도 해볼만큼. 그건 내 착각이더라도, 주차는 확실히 늘었다. 한 번에 쏙 자리에 넣고 내릴 때 그 쾌감, 오늘도 뭔가 이뤄 냈다는 이 작고 소소하고 대단한 성취감.
10층에서 11층으로 이사를 했다. 창가에 더 가까워져서 좋다. 해가 더 들어온다. 새로운 자리가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 꽤나 괜찮다. 일은 익숙해져서 괜찮다. 스트레스도 다 그럭저럭 이겨낼 만하다. 오늘 1,2,3을 하면 내일은 3,4를 할 수 있고, 그렇게 하다 보면 산더미 같은 일이 해결된다. 그냥 오늘 해야 할 일을 정하고 찬찬히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괜찮다.
거의 1년을 골치 아프게 하는 후임이 있어 요즘 온 신경이 거기에 있다.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한다거나, 분명 이렇게 하자고 어제 말했는데 다르게 하거나, 어떻게 그냥 대~충 넘어가려고 하거나, 꼼수를 쓰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아닌 척 오리발 내놓는다거나, 해야 할 일을 안 하거나...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최근엔 꼼꼼하게 모니터링했더니, 그게 힘들었는지 어디 가서 그 티를 냈다고 말이 나왔다. 사람을 대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나도 말하자면 한없이 쏟아낼 수 있겠다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안 좋은 말은 되돌아온다고 했다. 회사에선 최대한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좋다. 이번에도 나는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누구한테 말하긴 좀 그러니까 여기다 내 생각을 그대로 쓰고 끝내련다. 그 친구한테 일을 주느니 그냥 무료버전 GPT를 쓰는 게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오늘도 하고 싶은 말과 감정을 꾹꾹 눌러 닫고 보니 나의 인내심이 두텁게 강화되었다.
새로운 사업을 하고 싶다는 파트너사가 찾아왔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우리랑 뭘 잘해보긴 어려운 회사들이다. 하나는 시장을 전혀 모르는데 꿈이 컸고, 하나는 우리와 주파수가 전혀 안 맞았다. 예전엔 새로운 미팅에 새로운 것들을 해보려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에서 에너지를 얻었는데, 세상에 얼마나 치였는지 그게 이젠 뜬구름 쫒는 눈으로 보인다. 그들을 보는 내 눈은 동태눈이었겠지. 시간이 아까웠다.
점심으로 급식으로 나온 카레를 먹었다. 카레 자체는 괜찮았지만 버섯만 있던 것이 문제다. 아니나 다를까 퇴근시간에 혈당이 떨어져서 힘들었다. 출발하기 전 차에서 몽쉘을 먹었다. 몽쉘 최고! 이거 먹고 저녁은 방울토마토로 끝냈다.
퇴근길에 내가 공포스러워하는 구간이 하나 있다. 긴 터널인데, 그 구간만 차가 없는 데다가 과속 단속도 딱히 안 해서 제한 속도는 무시하고 고속도로처럼 차들이 질주한다. 나는 제한속도로 달리고 싶다.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그 구간이 나는 너무 무섭다. 어제는 구부러진 그 길을 달리는 사이에 자꾸만 차선을 벗어나는 것 같아 식은땀을 흘렸다. 오늘은 누가 쫓아오든 조금 더 천천히 가보았다. 여기에 언제 익숙해질까?
주말에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아주 재밌게 보곤 책까지 주문했다. 그래놓고도 다른 책에 욕심이 나서 회사 도서관에서 책을 두 권이나 더 빌렸다. 책을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요즘 생각. 계속해서 생각나는 것들을 메모하고 써 내려가야겠다는 생각. 내 안에서 스쳐서 떠나가는 것들을 잡아놔야겠다는 생각.
4월은 바쁠 예정이다. 이번 주말엔 호수에 꽃구경을 가고, 다음 주말엔 시댁 식구들이 처음으로 우리 집에 방문 예정이다. 엄마아빠는 시댁 식구들이 오셨는데도 남편한테 요리를 다 맡길 나를 생각하며 걱정부터 하셨나 보다. 나도 나 자신이 걱정이다. 내가 뭔가 해드려야 하는데, 준비가 필요하다. 4월 후 순에는 내 결혼식에도 와줬던 대학교 친구의 결혼식이 있고, 이모와 사촌들도 집에 초대할 예정이다. 그러고 나면 곧 5월이 오겠지.
티끌까지 모아 가진 돈 몽땅 때려 부은 이사가 끝난 후 두 달, 다시 수중에 돈이 좀 모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다시 돈 공부도 시작해야 한다. 몇 년간 그저 알뜰살뜰 모으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잊고 있었던 여행도 한 번은 떠날 때가 됐다. 지칠 대로 지친 남편에게 여행을 주고 싶어졌다. 집을 더 꾸미고 싶은 마음이 있다. 식물존을 더 예쁘게 가꾸고 싶기도 하고, 거실 벽에 철제 선반을 설치하고 싶은 마음도 여전히 있다. 그동안 옷도 잘 안 사서 오래된 옷들을 보내주고 좋은 옷들로 싹 갈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리고 아직은 감도 안 오고 실현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는 숙제도 이제는 진지하게 고민을 할 때가 되기도 했다.
두서없이 생각나는 것들을 마구 쏟아부은 오늘의 일상 누적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