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무사히 '숙제'를 마쳤습니다

회사도 운동도, 퀘스트만 깨다 끝나는 하루에 대하여

by 송윤환

# 숙제만 하는 인생

회의실 밖으로 나오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또 실적 이야기였다. 목표 대비 달성률, 전년 동기 대비 감소폭, 개선 방안.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가 빨간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빨간색이 이렇게 무서운 색인 줄 처음 알았다.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 시험지보다 더 무섭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동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다들 모니터만 응시한 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예전엔 점심 메뉴 하나 정하는 것도 30분씩 논쟁했는데, 요즘은 "부대찌게" "오케이" 끝이다. 회사 단톡방 분위기가 장례식장 조문 문자 수준이다.


누군가 복사기 앞에서 용지 걸림을 해결하며 혼잣말로 "아 진짜!"라고 중얼거렸다. 주변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서 쳐다봤다. 마치 도서관 열람실에서 치킨 먹는 사람 보듯이. 그 동료는 황급히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복사기한테 사과하는 건지 우리한테 사과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월요일의 배신

월요일은 재택근무다. '오늘은 출퇴근 시간을 아끼니까, 여유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동네 조깅을 마치고, 여유롭게 커피를 내리고, 바나나를 먹기 좋게 까고, 8시에 노트북을 켰다.

슬랙 메시지 47개.

'어? 나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스크롤을 내리며 확인해보니 별일은 없었다. 그냥 다들 불안해서 메시지를 보낸 거였다. "이거 확인 부탁드려요" "공유드립니다" "검토 요청드립니다". 부탁과 요청의 향연. 한국인의 겸손함이 슬랙에서 폭발하는 순간이다.


10시 화상회의. 카메라는 껐다. 화면 밖에서 나는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위는 단정한 라운드 티, 아래는 곰돌이 무늬 츄리닝. 이게 바로 재택근무의 로망 아니었나. 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될까.

"네, 잘 들리시나요?"

"네네 잘 들립니다."

"화면 공유 보이시죠?"

"네 보입니다."

잘 보이는데 왜 자꾸 물어보는 걸까. 그리고 나도 왜 대답하고 있는 걸까. 지금 화상회의를 하는 건지, 통신 상태 체크를 하는 건지 헷갈린다.

회의 중간에 택배 기사님이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재빨리 "잠깐만요, 연결이 좀..."이라고 하며 마이크를 음소거했다. 현관으로 뛰어가서 택배를 받고 돌아왔다. 숨을 고르고 음소거를 해제했다.

"아, 네 다시 들립니다!"

이게 맞나 싶다. 집에서 일하는 건데도 왜 이렇게 피곤한지.


#운동, 그 치열한 전쟁

퇴근하면 운동한다. 아니, '퇴근'이라는 개념이 모호해졌다. 노트북을 닫는 시간? 슬랙을 끄는 시간? 아무튼 그 애매한 시간 이후에 운동을 한다.

아파트 헬스장이 쉬는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은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헬스장으로 직행한다. 구글 캘린더에 운동 스케줄을 만들어놓고 보니, 마치 군대 훈련 계획표 같다. PX에서 컵라면 사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빡빡하다. 러닝, 풋살, 수영, 테니스, 탁구 까지.


친구가 물었다. "너 요즘 올림픽 나가냐? 왜 이렇게 운동만 해?"

"건강이 최고지 뭐~" 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나도 모르겠어. 그냥 이걸 안 하면 더 불안해.'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뛴다. 30분 동안은 업무 생각을 안 해도 된다. 숨이 차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평화다. 뇌를 끄는 합법적인 방법.


moises-alex-WqI-PbYugn4-unsplash.jpg 토요일 오전은 테니스 시간이다. 공이 날아온다. 라켓을 휘두른다. 둥! 소리가 경쾌하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로저 페더러? 조코비치? 아무튼 그런 느낌이다.


# 루틴의 아이러니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한다. 거울을 본다. 몸은 확실히 좋아졌다. 근육도 생기고, 체지방도 줄었다. 친구들이 "너 요즘 핏하다"고 칭찬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뿌듯하지가 않다.

소파에 앉아 유튜브를 켠다. 추천 영상에 "코어 강화 운동 10분 루틴" "테니스 백핸드 폼 교정법" 같은 게 떠 있다. 나는 그걸 또 본다.

'나 대체 뭐하는 거지?'

운동 끝나고 운동 영상을 본다. 운동에 대해 공부한다. 다음 주 운동 계획을 세운다. 이게... 취미가 맞나? 아니면 또 다른 숙제인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지금 '운동'도 숙제처럼 하고 있구나.

완벽하게 시간표가 짜여있다. 하나라도 빠지면 찝찝하다. '오늘 운동 안 하면 어떡하지?' 라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초등학생 때 숙제 안 하고 학교 가면 어떡하지 했던 그 불안감과 정확히 똑같다.


#숙제의 달인

생각해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숙제를 잘했다. 아니, 숙제를 '성실하게' 했다. 선생님이 시키는 건 다 했다. 학교 다닐 때도, 대학교 다닐 때도, 회사 다니는 지금도. 시키는 건 잘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뭘 하고 싶지?'라고 물으면 답이 매끄럽게 안 나온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상사가 "이거 해줘" 하면 한다. 잘한다. 빠르고 정확하게 한다. 그래서 또 일이 온다. 나는 또 한다. 이 무한 루프.

신입사원 때는 그래도 회의 시간에 질문도 많이 했고, 점심시간에 농담도 잘 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때 선배가 "너 텐션 좋다. 팀 분위기 살려주네"라고 했었다.

근데 지금 그 선배, 나보다 더 조용하다. 회의 시간에 입도 안 뗀다. 점심 메뉴도 "아무거나요"라고 한다.


분기 실적이 안 좋아지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처음엔 '일시적이겠지' 했다. 그런데 한 분기가 지나고, 두 분기가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경쟁사에게 고객을 모조리 뺏기고 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목소리를 낮췄다.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슬랙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이거 지금 물어봐도 될까?' '혹시 바쁜 거 방해하는 건 아닐까?'

한 번은 후배가 "선배님 질문 있는데요~"라고 밝게 말했다가, 주변 분위기를 읽고는 "아 아니에요, 제가 알아볼게요"라고 슬쩍 물러난 적이 있다. 미안했다. 후배야,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가 이상한 거야.


#숙제를 끝내며

이쯤 되니 내 인생의 최종 보스가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분명 내 삶의 주인은 나라고 배웠는데, 왜 나는 24시간 내내 누군가 내준 숙제를 검사받는 기분으로 사는 걸까. 회사에서는 실적이라는 숙제를, 헬스장에서는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이라는 숙제를, 심지어 침대에 누워서는 '내일 갓생 살기'라는 예습까지 철저히 한다.


하지만 뭐 어떤가. 숙제를 안 해서 가슴 졸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숙제 더미에 파묻혀 "아, 진짜 하기 싫다!"라고 투덜대는 게 한국인의 정체성 아니겠나.

대한민국 모든 숙제러들이여, 오늘 하루도 참 고생 많으셨다. 우리의 숙제 검사관이 부디 '참 잘했어요' 도장 하나쯤은 찍어주길 바라며, 나는 이만 퇴근... 아니, 다음 숙제를 하러 떠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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