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개의 글쓰기 39
차를 타고 가다가 아내가 예전에 살았던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는지 살짝 들뜬 듯한 표정으로 옛이야기를 꺼낸다. 무용담 같은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사람이 군대 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아내에게 군대에서 축구하다 간첩과 총격전 했다는 이야기 듣는 경험은 사양하고 싶다.
아직 감기가 덜나아서 기침이 계속 나왔다. 요전 날 저녁에 아내는 기침소리 크다고 면박을 줬던 것이 생각났다. 아내가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꽤 서러운 일이었다. 일부러 찔리라고 최대한 소리 줄여서 콜록거렸다.
"켈록... 켈록..."
이 여자가 페북 하느라 별 신경 안 쓴다. 기침은 시원하지 않고, 나 혼자 궁상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손해다.
문득 스물몇 살 옥탑방에서 자취할 때가 생각났다.
TV에선 옥탑방이 꽤 낭만적으로 그려진다. 청춘, 꿈, 막막한 미래와 답답한 현실,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음의 상징처럼 보여준다. 글쎄... 내가 자취하던 곳은 별로 낭만적이지 않았다. 여름에는 더럽게 덥고, 겨울에는 욕 나오게 추운, 그야말로 방하나에 허리 숙여야 하는 부엌 달린 작은 성냥갑 같은 곳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계절이 바뀌면 감기님이 꼭 찾아오셨다. 면역력을 담보로 야간시간을 돈과 바꿔주는 편의점 알바는 그래서 힘들었다. 오직 낮 시간에 뭐라도 해볼까 하고 했었다. 결론은 제대로 배우지 못해 애매하게 써먹을 잡기가 좀 늘었을 뿐이다.
그때도 여름이 시작할 무렵이었다. 선풍기 없이는 쉬이 잠들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야간 알바를 마치고 열에 들떠 기다시피 집에 들어와 얇은 담요 한 장 누런 비닐장판 위에 겨우 깔고 그대로 잠부터 잤다. 반은 자고 반은 앓았던 것 같다. 한참을 그렇게 끙끙거리다가 해가 가장 뜨거울 시간에 정신이 들어왔다. TV 위에 놓아둔 작은 선인장이 누렇게 보였다. 저게 초록색으로 보여야 정상인데 생각하며 일어나 앉았다. 자면서 몸에 힘을 하도 줬던 모양인지 허리를 펴자 우두둑거렸다. 다시 잘까 하다가 그냥 일어났다. 일단은 배가 고팠고, 저녁에 알바 나가려면 약이라도 사다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식은땀을 많이 흘려 눅눅해진 옷을 벗어버리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다라이에 물을 받았다. 눈 딱 감고 주황색 바가지로 물을 끼얹었다. 눌어붙은 조각 비누로 잘 나지 않는 거품을 내서 몸을 문질렀다. 신기한 게 방은 이렇게 더운데 부엌 물은 언제나 시리도록 차가웠다. (주인집 아저씨 말로는 암반 지하수라고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지하수인데도 수도세를 3천 원인가 따로 냈다는 게 잘 이해가 안 되기는 한다. 그때야 그러려니 했지만...)
다시 물이 받아져서 두어 바가지 퍼서 몸 헹구고 뻣뻣한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옥탑방이 좋은 것은 빨래가 잘 마르는 거다. 이전에 살았던 곳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서 늘 눅눅했다. 자꾸 우울해지는 것 같아서, 오직 햇빛 잘 드는 곳 찾다가 거기로 정한 거였다.
햇볕을 잔뜩 머금은 까실한 수건으로 몸을 닦으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트렁크 팬티만 얼른 하나 입고, 밥통을 확인했다. 약간 누렇게 굳은 밥이 보였다. 고무패킹이 낡아서 보온으로 해놔도 금방 밥에서 냄새나고 굳어버리는 거였다. 평소라면 이대로 물 말아먹고 도로 엎어져 잤겠지만, 그러기 싫은 느낌이 들었다.
집안을 뒤져서 천 원짜리 한 장과 오백 원짜리 두어 개, 백 원짜리 네댓 개를 찾았다. 반바지와 티셔츠를 대충 걸치고 슬리퍼 신고 나가서 감기약과 3분 카레 하나를 사 왔다.
가스버너에 물을 올리고 3분 카레를 덥히는 동안 냉장고 위에서 자주색 개다리소반을 내렸다. 집 앞 골목 어귀에 누가 버려둔 걸 주워와서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플라스틱 통째로 꺼냈다. 쿰쿰한 냄새를 맡자 배에서 꼬르륵 신호가 요동을 쳤다. 밥통을 까드득 긁어 대접에 밥을 담고, 다 끓인 3분 카레를 젓가락으로 건져 올려 부었다.
카레가 굳은 밥알을 좀 불려주기를 기다리는 동안 TV를 켜고 비디오테이프를 끼웠다. 폐업하는 비디오 가게에서 사 온 주성치 나오는 영화였다. 이미 서너 번 본 영화지만 혼자 있을 때 틀어놓기에 충분했다. 땀 삐질거리며, 주성치가 오맹달과 보여주는 희극에 낄낄거리면서 김치 한 줄 쭉 찢어 입에 넣었다. 시큼하니 혀에 침이 고이고 어쩐지 힘이 생겼다.
카레를 잘 뒤적거려 섞었다. 너무 딱딱해진 것은 그냥 떼어서 밥상에 건져냈다. 크게 한술 떠서 입에 넣으려다 갑자기 목이 마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깨어서 그때까지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었다. 그러자 갑자기 갈증이 심해졌다. 몸을 꺾어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쾅하고 시원하게 닫았다.
아아. 그러니까 냉장고 문을 닫자마자 들었다. '푸덕'하는 그 소리를...
좁은 방이라 냉장고 옆에 사과상자 같은 나무 궤짝 놓고 그 위에 TV를 놓았었다. TV 위에는 순전히 충동구매했던 2천 원짜리 선인장이 놓여있었다. 냉장고를 닫는 순간 궤짝이 흔들렸고, 그 영향으로 TV 위의 선인장이 밥상 위로 추락했던 거다.
선인장 모래가 절반쯤은 김치통에, 절반쯤은 카레밥에 쏟아졌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나왔다.
왜 하필 이 순간인가.
왜 하필 이때 목이 말랐을까.
뭐한다고 평소와는 다르게 냉장고 문을 쾅하고 닫았을까.
어쩌자고 선인장은 무정하게도 밥상 위로 떨어졌을까.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걸까...
지금 생각하면 웃음 나는 사소한 일이지만
당시 세상 고민 다 끌어안고 있던 감기 걸린 스물몇 살의 내게는 억울하고 서럽고 화나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천천히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나가서 모래가 많이 묻은 절반은 버렸다. 나머지는 조심조심 대충 물에 씻었다. 그리고 대접에 옮겨 담고 부엌에 주저앉아 거의 물 말아서 밥을 마시듯 삼켰다. 배가 고팠고, 감기약 먹고 자야 저녁에 일하러 나갈 수 있었으니까. 김치도 선인장도 모래도 다 봉지에 담아 내놓았다. 감기약을 챙겨 먹고 그대로 잠들었다가 겨우 일어나 일하러 나갔었다. 아마 그 날은 30분 정도 늦어서 교대해줘야 하는 형에게 미안했었다.
어느 날 뭔가가 내 앞에 나타나 20년 정도 전으로 돌아가도록 해주겠다며 영혼을 걸고 거래하자고 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거 목부터 조를 거다. 이샛키야. 내가 어떻게 버텨서 여기까지 왔는데...
집에 도착해서 아내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고, 쓸데없이 놀리다가 등짝을 맞고, 말라가는 레몬 민트(아내가 모히또 만들어먹겠다고 허브 사길래 '그거 말려 죽이려고?'그랬었는데 어쩐지 그대로 되어버렸다.)를 보며 이 사람과 결혼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유명을 달리한 선인장에 애도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