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척했던 그때.

100개의 글쓰기 47

by 김민성

후배의 소개로 처음 아내를 만났었다. 큰 눈에 성깔 있어 보이는 외모였다. 물론 그런 첫인상은 만나서 이야기를 시작한 지 5분이 못되어 깨졌다. 아내를 처음 본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었는데, 이렇게 표현하기로 했다.


- 아주 도도하고 모던한 사파이어 블루의 장독대.

- 진하게 끓인 된장국이 담겨있는 스타벅스 텀블러.


아마 아내를 만난 사람이면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올 거다. 외강내유한 스타일이고 하고, 겉모습에 비해 푼수끼가 꽤 있는 시원한 성격이었다.

주선한 후배가 가고 나서 아내는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이 사람이 글을 쓰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조금 지쳐있었다. 물론 겉으로야 밝게 웃고, 씩씩한 모습이었지만, 내 눈에는 잔뜩 화가 난 아이가 거대한 글 감옥에서 분노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사실 당시 나 역시 깊은 좌절과 막막한 심장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계획했던 일은 막혔다.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은 주저하다 놓쳐버렸다.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길은 보이지 않았고, 속은 곪아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으며, ‘신뢰'라는 말 자체를 믿지 않게 되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난 그 시점에 아내와 내가 차이가 있었다면, 아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고 나는 듣기만 했다는 정도였다. 사실 정도로 치면 내가 더 상태 안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내에게 최대한 부드럽고 편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해줬다.

세상의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고. 기독교에선 그걸 ‘하나님의 때'라고 한다고. 하나님의 때는 내가 원하는 시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오직 하나님 당신께 속한 것이다... 아마 그렇게 차분히 이야기해줬던 것 같다.
지금까지 당신은 잘 해왔고,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 해나갈 것이니, 조급해하지 말라고...


그 모든 말들은 사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몸은 지독하게 피곤해서 그대로 잠들고 싶은데, 이상하게 정신만은 깨어있는 새벽에 누군가 나에게 답을 준다면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거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언도 필요 없이, 그냥 나에게 토닥거리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했던 말을 아내에게 늘어놓았었다.
내가 그랬다는 것은 아내와 결혼하고 3-4년 살고 난 후에나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아내는 내게 더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내게 하나님(누군가에게는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의 일하는 방식이 초월적 계시나 기적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냥 늘 사람이었다. 별 대수롭지 않은 일상 대화 속에서, 사람을 만나는 시간을 통해서, 사소한 글이나 장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잘난 척하며 아내에게 늘어놓았던 ‘하나님의 때'는 지난 후에나 스스로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대충 이런 거다. 그 시점이 의미 있는 시간으로 느껴진다면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증거다. 반대로 도무지 아무런 감흥 없는 비참함이 계속되고 있다면 난 여전히 헤매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다.

하루 종일 앞에서 글을 쓰던 아내는 피곤한 표정으로 크게 하품을 하고 있다.

아내를 처음 만난 5년 전이 내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은 확실히 맞다.
아내를 만나 지금까지 잘 해왔고,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 해나갈 것이다.
남자는 등으로 말한다고 했다.
아내와 살면서 등짝의 굳은살은 날로 두터워지고 있다. 이 정도면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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