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커피라이프(4)

100개의 글쓰기 46

by 김민성

결혼하기 전,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사람은 역시나 택배 아저씨였다. 일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관리실에서 택배를 찾아 집에 올라오는 길은 늘 두근거렸다. 후라이팬으로 홈 로스팅을 시작하면서 500g에 8,000원~20,000원 사이의 생두를 여러 종류 구입하게 되었다. 게시판에서 예가체프가 좋다는 이야기를 읽으면 그게 좋아 보이고, 케냐 AA가 좋다면 또 그게 궁금했다. 에티오피아 시다모, 과테말라 안티구아, 인도네시아 만델린 등 커피는 종류도 많고 이름도 길었다.

옷 대충 벗어서 던져놓고, 샤워 초스피드로 하고, 물기도 대충 닦았더니 새 팬티가 반은 젖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이제 도착한 생두가 든 택배 상자를 뜯는 것이다. 나꼼수를 틀어놓았더니 혼자 있는 방이 시끌시끌하다. 9000원짜리 콜럼비아 슈프리모 봉지를 뜯었다. 하얀 쟁반에 연녹색 커피콩을 쏟아부었다. 간만에 여유가 생겨서 핸드픽을 해놓을 생각이었다.

여기저기 게시물 뒤져서 알게 되었는데 커피열매에서는 보통 두 개의 생두가 나온다고 했다. 땅콩처럼 두 개가 붙어서 하나처럼 보이는 거다. 이 생두를 적절한 온도에 적절한 시간을 볶으면 그게 로스팅이라 했다. 얼마나 오래, 균일하게 볶는지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로스팅에 상당한 경험과 커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누군가는 커피 종류와 양과 시간에 따라 어찌해야 하는지 엑셀로 정리해서 올리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소리로 파악한다고 했으며, 누군가는 아예 수동식 커피 로스터를 만들기도 했다.
세상에는 무시무시한 능력자들이 참 많다. 잉여력만큼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요소가 또 있을까…

초록색 날콩 중에는 건조과정에서 깨진 것도 있고, 상한 것도 있다. 이런 생두는 볶는 과정에서 다른 커피보다 쉽게 타버려서 맛을 해친다고 했다. 이런 걸 결점두라고 부르고 미리 솎아내는 것이 좋다고 했다. 가급적 비슷한 크기와 모양의 생두를 남겨놓아야 로스팅하기가 편하다고도 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어서 시간 있을 때 작업해두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골라내는데 벌레 먹은 것도 아니고 깨지거나 상한 것도 아니지만 모양이 다른 생두와는 좀 다른 애가 눈에 들어온다. 다른 생두보다는 살짝 작고 모양이 둥그렇다.
‘아… 얘가 피베리(peaberry)라고 하는 거구나…’

언젠가 읽은 기억이 났다. 두 개의 생두가 나오는 것이 정상인데, 간혹 저렇게 동그랗게 생긴 하나만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동그란 완두콩 모양이라 ‘피베리'라고 따로 부른단다. 얘는 결점두는 아닌데 모양이 달라서 함께 볶기 애매하다고 했었다. 사실 얼마 전부터 이런 애들만 따로 빼두기로 했다. 작은 주머니에 동그란 피베리를 따로 골라 담았다. 이렇게 모으면 언제는 콜롬비아 피베리가, 또 언제는 케냐 피베리가, 그리고 또 언제는 과테말라 피베리가 섞인다. 이렇게 모으다 보면 언젠가 피베리만 50g~100g 모일 거다. 그렇게 모인 생두를 로스팅하면 일평생 한 순간 맛볼 수밖에 없는 블랜딩이 될 것이다. 커피 종류도 다르고 비율도 다르고 해서 맛이 어떨지 예상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독특한 커피가 되겠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다른 생두와 달라서 ‘피베리'라고 이름이 따로 붙었지만 그래도 커피다. 뜨거운 태양을 견디고 뿌리에서 올라온 영양분을 온몸에 담은 어엿한 커피다. 그냥 모양이 좀 다를 뿐이다. 사실 내게는 그래서 더 기대가 되고 특별한 느낌이었다.

그 후로 두어 달 후에 난 피베리만 따로 로스팅했었다. 50g 모일 때까지 못 기다리고 호기심에 30g 정도 모였을 때 로스팅했었다. 다른 생두에 비해 후라이팬 속에서 떼굴떼굴 구르는 소리가 훨씬 경쾌했다. 로스팅을 끝내고 사흘 정도 숙성시킨 후 핸드드립 해서 마신 커피는 정말 특별했다. 향이 더 강하고, 맛이 더 다양하고, 혀끝을 부드럽게 감싸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게는 그냥 커피였다. 내가 로스팅한 커피.

요 몇 번 커피 로스팅 글을 쓴 이유가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길게 나눠서 쓴 거다.

아내가 이번에 쓴 동화책 ‘글로벌 컬처 클럽'은 다문화 이야기다. 엊그제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놓고, 아침에 커피 갈다가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어쩌면 이 피베리 같은 아이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피베리는 그냥 놔두면 다른 생두들 사이에서 결점두 취급받지만 사실은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커피였다.
아이들도 그렇다. 피부색이 좀 다르고, 엄마나 아빠의 나라가 좀 다르고, 집 분위기가 좀 달라도 엄연히 우리 아이들이다. 달라서 오히려 특별한 우리 아이들이다. 어디 다문화라는 틀만 그럴까? 부모님 중 한 분만 있는 아이, 한쪽 다리가 불편한 아이… ‘보통'의 범주에 넣고 보면 다른 거다.
나만 해도 생각해보면 혀가 짧아 말을 더듬는 아이였고, 자신감 없어 뭐만 시키면 우는 아이였고, 조금만 스트레스받으면 배가 아파 화장실 달려가는 아이였고, 행동하는 게 굼떠서 선생님이 ‘거북이'라고 부르는 아이였다. ‘평범'의 범주에 넣고 보면 함량 미달에 가까운 아이였다. 물론 책 속의 아이들이 겪는 차별이나 상처를 받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는 ‘난 왜 이럴까?’ 고민했었다. 부모님께는 언제나 속 깊고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이었지만...

아내가 쓴 동화책을 읽고 꼭 다문화 친구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남과 좀 달라서 고민인 아이들이 있다면 한 번쯤 되려 큰소리 칠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그래! 난 너희랑 좀 달라. 그래서? 뭐? 어쩌라고? 왜?”

아이들이 책을 읽고 알아줬으면 한다.
세상은 온통 다른 것 투성이고, 그렇게 달라서 특별한 너희를 좋아하고 지지하며 애정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너희 자체로 이미 충분히 멋진 향을 내는 베리 베리 피베리라는 것을…

ㅡㅡ;;; 에잇. 마지막 줄 라임 잘 맞는다고 썼는데 유치해졌다. 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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