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개의 글쓰기 45
새벽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왔다. 택배 물건을 하차하는 것은 꽤 고된 일이다. 집에 들어와서 땀에 젖은 옷을 벗어놓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몸이 늘어진다. 30분만 잘까 생각하다가 이내 뺨을 툭툭치고 마음을 접는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다.
엊그제 볶아놓은 커피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고 나니 근사한 향에 기분이 좋아졌다. 포트에 물을 올리고, 여과지를 꺼냈다. 1-2인용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서 3-4인용을 가위로 잘라서 쓰고 있다. 어차피 혼자 마시는 거 대단한 격식 차릴 이유도 없다. 여과지를 접어 드리퍼에 올려놓는다. 포트에서 슬슬 물 끓는 소리가 들린다. 수저로 원두를 대충 두어 번 떠서 핸드밀에 넣고 갈았다. 핸드밀을 돌릴 때마다 가르륵 가르륵 소리와 함께 원두가 분쇄되며 고소한 향을 내뿜는다.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입꼬리가 그저 올라갈 뿐이다.
물이 다 끓어 주전자에다 옮겨 담았다. 마음은 동으로 된 드립 포트를 사고 싶었으나 현실은 주둥이 길고 가는 7천 원짜리 스뎅 주전자도 감사할 따름이다. 뺀치로 주둥이를 접어서 나름 물줄기도 가늘게 나온다. 그러니 내게는 충분히 훌륭하다.
여과지를 적시고 컵 온도도 올릴 겸 컵에 빈 드리퍼를 올리고 먼저 물을 붓는다. 슈욱하며 뜨거운 증기가 올라온다. 물이 너무 뜨겁다.
주전자를 잠시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한 잔 마셨다.
커피는 뜨겁게 물은 차갑게… 내겐 진리다.
드리퍼에 갈아둔 원두를 붓고 살짝 쳐서 평평하게 만든다. 왼손은 싱크대 끝을 잡고 오른손으로 주전자들 들어 드리퍼에 천천히 기울인다. 물줄기가 찬찬히 흘러나와 커피 위로 떨어진다. 일단은 가볍게 적실뿐이다. 츠윽 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가 부풀어 오른다. 뜸 들이기를 위해 주전자를 내려놓고 팔짱을 낀다. 이제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마음대로 37까지 센다. 그냥 지금 내가 서른일곱 살이니까…
다시 왼손은 싱크대 끝에 대고, 오른손으로 주전자를 들어 서서히 기울인다. 주전자 주둥이 끝으로 물줄기가 예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너무 급하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하면서 서서히 타원을 그리며 추출을 시작한다. 드리퍼 벽에 직접 물줄기가 닿지 않도록 신경 쓰느라 인상이 절로 써진다. 가만 생각해보면 난 교회에서도 이정도 경건한 마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역시나 함량 미달이다.
주전자를 내려놓고 물이 빠지기를 기다린다. 커피 향이 부드럽게 올라와서 간질거린다.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온다.
또다시 왼손을 싱크대 끝에 놀리고, 오른손으로 주전자를 들어 서서히 기울인다. 급하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은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 속으로, 속으로, 속으로 중얼거리며 커피를 내린다.
요전에 본 영상에서 일본 칼리타 사장은 참 대수롭지 않고 편하게 커피 내리던데, 나는 이게 뭐라고 손이 떨린다.
전문가는 어려운 일을 대수롭지 않게 하는데 결과는 한결같이 나오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마실만큼 커피가 내려졌다. 드리퍼를 치우고 컵을 들어 살짝 입에 대고 한 모금 들이킨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커피 향이 코를 타고 뒷머리를 지나 몸 전체로 퍼지는 상상을 해본다. 호로로로롱 소리를 내면서 최대한 맛을 음미한다. 유튜브 보니까 이렇게 하면 더 풍부하게 커피를 즐길 수 있다고 했었다. 해보기는 한다만 내가 무뎌서인지 큰 차이는 모르겠다. 그냥 혼자 겉멋과 허세를 부려보는 거다. 다른 사람이 있으면 절대 안 할 짓이다.
싱크대에 널브러진 커피 가루를 치우고 커피를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내가 볶은 커피라 맛은 둘째치고 의리와 애착으로 마신다.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별거 없는 안부와 시시껄렁한 헛소리를 나눈 후… 녀석이 대뜸 물어본다.
“형. 우리 교회에 아동부 선생님 있는데 한 번 만나볼래?”
“동화 쓰는데… 음… 그러니까 형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하필이면 서른일곱의 5월 중순 후배 김완수(지금은)목사님 덕분에 그녀를 만나기 전 어느 날이었다.
ㅡ,.ㅡ;; 오늘의 커피 이야기 마지막... 저게 벌써 5년 전이다... 아하하 시간 참 빠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