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개의 글쓰기 49
<하루살이..>
"나 결혼한다."
태규 녀석이 내뱉듯 한 말은 참 뜬금없었다. 게다가 내 알기로 4년 전 은영이랑 헤어진 이후로 누군가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다. 이 뜬금없는 고백에 불알친구인 내가 해줄 수 있는 반응은 한 가지뿐이다.
"ㅋㅋㅋ 미친. 아~ 눼에눼에~ 그러시겠지요. 님이 결혼하면 내가 집 사줄게요. 헛소리하지 말고 힐이나 제때 넣어라. 보스 떴다. 물약 값은 벌어야 할 거 아니냐. "
"아 놔. 좋게 말하니까... 씨발아. 진짜 결혼할 거라고."
태규 녀석이 좀 진지한 표정이라 믿어줘야 하나 싶은 순간, 해골 병사의 녹슨 칼이 날아들었다. 왼팔의 버클러로 슬쩍 흘려내고, 축성받은 대지의 철퇴로 대가리를 날려버렸다. 확실히 언데드 계통의 몬스터에겐 칼보다는 둔기 계통의 무기가 효과적이다.
"일단 저거 필드 보스 스켈레톤킹 부터 잡고 생각하자. 태규야."
"알았다. 버프 받아라. 철면피!!"
태규의 중얼거림이 끝나자 초록색 빛이 나를 감쌌다. 지하 동공의 눅눅한 기운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방어력 +10%, 모든 저항 +5%, 생명 회복력 +5% 지속시간 1분 30초.
"아. 새꺄. 스킬 이름 좀 바꾸면 덧나냐? 철면피라나... 매번 받을 때마다 존나 기분 이상하다고!"
"조까. 그럼 니가 사제 키우든가! 왜 내가 캐삭해버릴까?"
"아닙니다. 갑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필드 보스 스켈레톤킹이 소환한 언데드 무리들을 착실히 줄여가며 실없는 소리 지껄였다. 벌써 5번째 도전하는 거라 잔 몹의 공격 패턴은 다 파악해서 긴장감이 떨어진 면도 있다.
"야. 저기 하급 구울 한 마리는 남겨둬. 저번에 니가 미친놈처럼 날뛰다가 쫄을 다 죽여버렸더니 새로 소환해버렸잖아. 귀찮다. 빨리 끝내자."
"어키어키. 저기다 메즈 걸어서 기절시켜줘. 보스랑 다이다이 뜰 테니까"
"ㅇㅇ. 너님은~왕따~ 캔디캔디~"
태규는 한쪽에 널브러져 꿈틀거리며 기어 오는 하급 구울을 향해 양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은색 구가 생성되어 구울에게 날아갔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기어 오던 구울은 그대로 딱에 박힌 듯 버둥거릴 뿐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그나저나 확실히 저 샛키 작명 센스는 변태다.
.
"미친놈아. 나 신경 끄고 앞에 봐!"
태규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본능적으로 옆으로 굴렀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스켈레톤킹의 거대한 본블레이드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틀어박혔다.
"씨바. 좇될 뻔했네."
"안타깝네. 너 뒈지는 꼴을 또 볼 수 있었는데..."
"미친년아. 나 뒈지면 너는? 안 그래도 렙따 해서 회복하는데 일주일이나 걸렸구만."
"ㅋㅋㅋㅋㅋ 됐고. 버프 한 방 더 간다. 이번에 끝내라."
"어키."
"철면피 주식회사!!"
아까보다 더 선명하고 밝은 초록빛이 내 몸을 감쌌다. 축성받은 철퇴에도 은은한 초록빛이 돌기 시작했다.
-방어력 +20%, 모든 저항 +10%, 생명 회복력 +7%, 언데드 공격력 +5%, 치명타 확률 +7%, 지속시간 1분 30초
이름은 거지 같아도 효과는 확실했다. 철퇴를 휘두를 때마다 데미 리치의 피가 쭉쭉 빠졌다. 태규 녀석은 뒤에서 끊임없이 내 체력이 70% 수준에서 빠지지 않게 회복시켰다. 풀피 채우면 어그로가 튀어서 데미 리치의 공격 우선순위가 자신에게 갈 것을 아는 거다.
"으랏차차! 좋아! 파이널 일격이다! 받아라 나의 철퇴는 하늘을 뚫는 철퇴다! 아방 스트랏슈!!!!!"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들어간 일격이 제대로 먹혀, 크리티컬이 뜨면서 스켈레톤킹이 무너져 내렸다.
"루팅~루팅~ 즐거운 루팅~~"
"은동아. 나 진짜 결혼한다고."
진짜인 모양이다. 녀석이 목소리가 진지하다. 기분이 묘해졌다.
"알았다. 일단 접속 끊고... 만나서 이야기하자. 내가 늬네 원룸 쪽으로 갈게..."
"ㅇㅇ. 이따 보자."
하얀빛무리를 남기고 녀석은 사라졌다. 12년째 하고 있는 게임이지만, 간혹 이곳이 현실 같고, 밖이 거짓 같을 때가 있다. 아니 이곳이 현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여기서 나는 나름 자리 잡은 네임드 자유기사지만... 밖에서야 그저 그런 하류인생일 뿐이니까...
"접속 종료"
-접속을 종료하시겠습니까? Yes / No
" Yes"
-접속을 종료합니다. 모험과 꿈이 있는 세계 '제네시스' 9...8...7...6...5...4...
VR 헤드셋과 컨트롤러를 벗어서 침대 위에 던져두고, 츄리닝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빽빽하게 들어선 원룸촌 건물들을 지나 태규 녀석이 사는 쪽으로 걸어내려 왔다. 태규 놈은 편의점 앞에 주저앉아 맥주 한 캔 들고 담배를 빨고 있었다.
"왔냐? 네 거 여깄다."
태규 건네는 캔을 받아 들고 옆에 쪼그려 앉았다.
'치익'하는 소리를 들으며 캔을 따서 일단 맥주를 들이켰다.
"나. 결혼한다."
"아까도 이야기했잖아. 근데 누구랑? 너 여자 없잖아?"
"이루릴."
"응? 누구? 너 나 몰래 어디 외국 갔다 왔냐?"
"대장간 스미스 영감 손녀 이루릴."
"아. 그 이루릴. 난 또 누구... 에?"
"응. 그 이루릴."
"태규야. 니가 외로움에 미쳤구나. 형이랑 병원 갈까?"
"나 궁서체다."
"미친색꺄. 게임하고 현실하고는 구별해야지. 그거 게임 속 NPC하고 뭔 결혼이야?"
"이루릴은 달라.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제네시스 다음 대규모 업데이트에 인공지능 상향 부분이 들어가 있어. 테스트 서버에서 흘러나온 말에 따르면 NPC들의 반응이 사람이나 다름없다더라. 알아보니까 특정 NPC하고 결혼하는 것도 가능해지고 그 경우 추가 과금하면 개인 맞춤형 학습 인공지능이 부여되는 모양이더라."
"... 그... 그러냐."
클로나이드에서 내놓은 가상 게임 '제네시스'가 아무리 현실적이라도 게임은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 태규 녀석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나니 괴상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너도 알겠지만, 은영이랑 헤어지고... 여자 생각 따위 안 했다. 결혼 같은 거 생각도 안 했고. 근데 외롭기는 하더라..."
"그럼 현실에서 사람을 만나야지..."
"ㅋㅋㅋㅋ 현실에서....?"
"응"
"야. 내가 계산을 좀 해봤거든? 내가 한 달에 198만 원을 벌어. 월세 45만 원에 관리비 5만 원, 공과금 8만 원, 식비 적당히 먹으면 58만 원, 의료보험 8만 원, 이것저것 보험 17만 원, 핸드폰 8만 원, 교통비가 22만 원, 옷이라도 사고 품위 유지하는데 20만 원... 이랬더니 7만 원 남더라. 제네시스 월 결재하면 5만 원인데 3개월 선결재하면 12만 6천 원이라 그거 쓰니까 4만 2천 원. 그니까 3만 8천 원 남더라. 담배 끊을 생각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만... 돈 없어 끊는 건 가오 상해서 버티고 있었는데. 진자 끊으련다."
"..."
"나 혼자 사는데 돈이 이렇게 들더라. 근데 현실의 여자? 누구? 아서라. 피차 고생이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악다구니만 남으면..."
"..."
"언론에선 현실도피니 뭐니 하더라만... 웃기는 소리지. 야. 나는 그나마 정규직 대우 무기계약이라 저거라도 받지... ㅋㅋㅋ"
"미친놈."
"클로나이드에서 뭔 로비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혼인신고도 가능하다더라. 요즘은 말이다... 어디가 현실인지 모르겠다. 아니 어디가 현실이든 뭔 상관이 있겠냐? 더 행복한 곳에다 마음 붙이고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고말이다..."
"미친놈."
.
태규는 마지막 담배를 꺼내 들더니 한참을 쳐다봤다. 저걸 돗대라고 가장 맛있는 담배라고 했다. 마지막이니까... 언젠가 일본어로 돗데오키라며. 소중하게 남겨둔 마지막을 일컫는 말이라 했었다. 돗대는 아버지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법이라며 병맛 같은 소리를 지껄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태규는 뭔 생각인지 피식 웃더니 그 소중한 담배를 다시 담뱃갑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그대로 와그작 쥐어 구기더니 한쪽 구석에 내던져버렸다. 소중하게 남겨둔 마지막이 구겨져 바닥에 나뒹구는 꼴을 보니 어째 친숙하게 느껴졌다.
.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편의점 전광판 파리한 빛 아래 한참을 앉아있었다.
.
"결혼... 축하한다."
"집 사줘"
"꺼져."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