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개의 글쓰기 53
오늘은 기상으로 시작해서 취침으로 끝날 모양이다.
임정진 작가님의 그림책 '연탄집'을 선물로 받았다.
이야기는 담담했다.
가난을 과장하지도 않았고, 추억을 포장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욱 마음속으로 녹아들어 왔다.
사무실에서 후드를 쓰고 일하는데 문득 옛 생각이 툭 튀어나왔다.
24살 무렵, 기름 떨어진 자취방에서 잠을 자려면 꽤 단단한 준비가 필요했다.
전기장판은 고장 났고, 일제시대에 지어졌음직한 자취방은 외풍이 심했다. 아무리 문틈을 꽁꽁 막아도 어디선가 칼날 같은 바람이 차갑게 들어왔다.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소리는 주인집에서 돌아가는 기름보일러 소리였다.
머릿속으로 열흘 정도 지나면 받을 수 있는 알바비와 남아있는 생활비를 얼추 계산하고, 밥 몇 끼 대통 거르고 때우면 보름치 기름 사다 넣을 수 있겠다 생각했었다. 한기만 가시게 보일러 틀 수 있으면 충분하다 생각하며 잔뜩 웅그리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마가 차서 짜증이 났다. 찬 공기에 머리가 띵띵 아팠다. 밤사이 입김에 축축해진 마스크를 대충 던져두고 주인집 할머니가 계신지 귀를 기울였다. 할머니는 아침이면 양동이 하나 가득 물을 끓이셨다. 인기척이 없으면 몰래 가서 그거 한 바가지 훔쳐 쓰고는 했다. 그때마다 심장은 그렇게 벌렁거렸고, 행여 밖에서 할머니 들어오시는 소리 들리는지 온 신경을 써야 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서울 산다는 할머니의 큰따님이 '학생'하며 나를 불렀다.
뜨끔했다.
월세 드려야 하는 날은 아직 시간이 좀 있었지만, 수도세나 전기세는 사정 있어서 한 달 밀려 있었다. 할머니 몰래 떠다 쓴 뜨거운 물이니 하는 것까지 떠올라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졌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뭐라고 죄송하다 해야 하나...
부끄럽기만 했다. 아버지, 어머니 아시면 뭐라 하실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찬물로 씻는다고 어찌 될 것도 아니었는데. 수도세니 전기세니 얼마 되지 않는 거 그때그때 드렸어야 하는데... 상념은 끝없이 이어졌고, 자책이 밀려왔다.
쭈뼛거리며 나갔더니 마흔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큰따님이 계셨다.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시며 말씀하셨다. 할머니 바깥 화장실에 가스온수기를 달았다고, 뜨거운 물이 나오니까 그거 써도 괜찮다고 하셨다. 어머님께서 학생이 기름도 안 떼고 사는 것이 안쓰러워 말도 못 하시고는, 그냥 아침에 뜨거운 물이라도 쓰라고 끓이셨다했다. 내가 숫기가 없는지 그마저도 못쓰는 게 영 걸려하셨단다.
젊은 사람이 무슨 눈치를 그리 보냐면서 안 그래도 되니까 앞으로 거기서 씻고 하라셨다. 할머니 혼자 계셔서 늘 걱정이었는데, 손자 같은 학생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좋으시다 했단다. 무릎이 안 좋으셔서 수술하러 서울 가야 하는데 아랫방 학생이 걱정이라며 그리 염려를 하셨다고 했다.
착하디 착한 자녀분들은 그런 할머니를 위해, 속 없는 자취생을 위해 가스온수기를 달아줬고 말이다.
뜨거운 물에 머리를 감는데 비눗물이 자꾸 눈에 들어가 눈물이 펑펑 났다.
할머니는 여름 무렵 다시 오셨다. 자취방 앞 점빵에서 아이스크림 사다가 할머니 집 토방에 앉아 까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집에서 겨울을 세 번 났다.
서른몇 살쯤 되었을 때 지나갈 일이 있어서 혹시 나하고 근처에 들렀는데 재개발되어 내가 살았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었다.
겨울은 지금도 싫다. 앞으로도 싫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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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페북에 쓴 글인데... 뭐하다 보니 올라와서 다시 올려봅니다.
겨울의 초입. 모두 건강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