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개의 글쓰기 54
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다.
"아야, 이거시 안된다야. 으짜끄나?"
밑도 끝도 없이 대뜸 안된다고 하시는데, 사실 이젠 익숙하다. 컴퓨터 뭐가 뜻대로 안 되시는 거다.
"뭣이 으찌케 안되는지 말씀을 해줘야제 도와드리제라... 뭣이 안돼요?"
이상하게 부모님하고 통화할 때면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온다.
"그랑께. 이메일이야. 그거슬 보낼라고 한디 으디로 가라고 했냐? 그때 니가 갈쳐줬는디 기억이 안나야."
"자꾸 안해보믄 당연히 까묵어요. 아직 광주 안올라갔응께 가서 알려드릴게요. 향교에 계시요?"
"잉. 을마나 걸리겄냐?"
"한 30분이면 가겄소. 금방 가..."
뚜우...뚜우...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전화를 끊으셨다. 늘 그랬듯이.
향교 사무실에 갔더니, 아버지는 필생의 적을 마주 하시는 양 컴퓨터 앞에서 고뇌하고 계셨다.
"왔소. 뭣이 안된다고요?"
"아니,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메일을 보낼 줄 알아야한디... 그것을 못하겄어야."
다행히 사무실로 쓰는 방은 따듯했다. 책상이 몇 개 있고, 각종 서류와 오래된 책들이 쌓여있었다. 한쪽에는 미니 커피자판기도 있어, 누르기만 해도 다디단 커피가 나왔다. 사간 꿀떡을 옆에 두고 하나 집어먹었다.
"급하게 메일 보낼 곳이 있었소?"
"아니. 그것은 아닌디. 지난주까지 바뻤단말이다. 인자 좀 한가 해징께 배울라고 그라제."
"그라믄 한 번 봅시다. 자... 아부지가 쓰는 메일이 한메일이구만요. 그라믄 다음으로 들어가시믄 된단 말이오."
익스플로어에서 다음 주소 치고, 로그인하는 법 알려드렸다.
"여기다가 아부지 메일 아이디를 치면 된디... 아이디는 있지라?"
"잉. 그때 여기다가 적어놨다."
아버지의 검은 수첩에는 뭔가가 잔뜩 적혀있다.
'HWP 문서 -> 마우스로 블럭 -> 컨트롤+C -> 컨트롤+V...'같은 내용들이다.
익숙하지 않은 컴퓨터를 쓰기 위해 다 메모해놓고 그때그때 보시며 사용하는 거다.
내겐 손에 익어 너무 당연한 것들이 아버지에겐 서투르고 새롭다.
당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연결해서 만든 아이디를 영어 자판에서 하나하나 찾아 누르신다. 양손 검지에 힘을 잔뜩 주고, 입으로는 알파벳을 부르며 눈은 바쁘게 해당하는 키를 찾는다.
내 눈에는 자판 위치가 다 보이는데, 당신 눈에는 어른어른해서 다 똑같이 보이는지 한참을 들여다보고는 하나 누르고, 또 한참을 들여다보고 하나 누르신다.
"찬찬히 하시쇼. 아부지는 자주 안씅께 키 찾을라믄 힘들어요."
하도 집중해서 안들리시는 모양이다.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귀여웠나 싶다.
어렵게 로그인이 끝났다.
"여기 '메일'이라고 되어있응께, 이거 누르믄 이메일 하는 데로 들어가요."
"잠깐만, 가만있어봐잉. 잔 적자."
펴놓은 수첩에 파이로트 볼펜으로 '로그인 -> 메일 누를 것'이라고 적으신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귀여운 면이 있었나 싶다.
그 뒤로도 아들은 꿀떡을 하나씩 집어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메일 보내는 법, 파일 첨부하는 법, 스팸메일 지우는 법등을 차례로 알려드렸다. 아버지는 큰아들이 알려주는 걸 행여 놓칠까 모니터 한번 보고, 키보드 한 번 보고, 수첩에 적고, 맞게 적었는지 모니터 한번 또 보고 하시느라 정신없으시다.
꿀떡을 씹고, 커피 홀짝거리며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데 울컥 목이 메려 했다.
어릴 때, 거의 모든 아들들이 그렇듯 난 아버지가 세상에서 못하는 일이 없는 줄 알았다.
커가면서 보통인 내 아버지에기 반발도 하고, 실망도 하고, 짜증도 냈다.
아버지를 완전히 닮아 있는 나를 인정하기까지 꽤 길게 돌아왔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직 계셔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혼자 이런저런 감상에 빠져있다가 슬쩍 보니 아버지는 몇 번이고 수첩과 모니터를 번갈아보며 연습하신다.
아마 언젠가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보고 있으셨을 거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것을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쳐 주셨을 테니 말이다.
더 있으면 계속 감상적이 될 것 같아 슬슬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뭐 물어볼 것 없소? 광주 가기 전에 갈쳐드리께라."
"일단, 괜찮다. 생각나믄 전화하믄 되제."
"그라쑈."
자갈 깔린 향교 마당을 지나 차 빼서 운전하는 아들의 모습을 끝까지 보고 나서야 아버지는 사무실로 들어가셨다.
다음번에 아버지에게 컴퓨터 가르쳐드리러 갈 때는 대나무 자라도 하나 준비해 가야겠다.
몸으로 배워야 오래 잊지 않는 법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