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을 거절하다

100개의 글쓰기 64

by 김민성


“김매니저! 내 커피는 어디에 있나?”
“여...여기 있어.”

“그래, 좋아. 그럼 이제부터 내가 스트레칭하는 동안 재활용 쓰레기 내다 버리고, 가는 길에 빵 사 와!”


아침부터 임작갑의 업무지시가 떨어졌다. 내가 지형씨랑 결혼해서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내가 느끼는 기분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면 감정의 찌꺼기가 쌓이게 되고, 그것이 어느 순간 의도치 않게 폭발해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시간과 경험으로 체득한 교훈이다. 그래서 오늘은 나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지형씨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싫어.”


나의 거절에 지형씨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했다.


“맞고 갈래?”

“아니 그런 법이 어딨어?”

“여기 있어. 너의 거절을 거절한다. 내가 우리 집의 법이다!”


거절.jpg


너무 당당하게 뻔뻔해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이 여자가 전에는 안 그랬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언제부터 이렇게 ‘거절’에 당당하게 굴었단 말인가! 기가 막혔다.
생각해보면 지형씨가 처음부터 저렇게 거절에 당당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거절당함에 힘들어했었다. 특히나 자신의 작품이 공모전에서 미끄러졌을 때나 출판사에 보내서 거절당했을 때는 더더욱 속상해했었다.


사실 그렇다. ‘거절당함’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거절 자체보다는 ‘자신이 부정당한 느낌’이다. 그 부정당하는 느낌이 스스로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다. 사소한 부탁이든, 중요한 제안이든, 공을 들인 작품이든 거절당한 경우 따라오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감정은 마치 자기 자신이 부정당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차라리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작품을 쓰지 않았다면 이렇게 거절당하지도 않았을 것을 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지형씨의 경우에는 자신이 쓴 작품이 거절당하는 경험이 많았으니 꽤 아팠음이 분명하다. 글을 쓸 때 자신을 투영해서 씀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결혼했을 때는 거절당함을 잘 견디지 못했다. 특히나 두 번째 책인 ‘열두 살의 모나리자’와 세 번째 책인 ‘마루타 소년’이 나올 때, 참 많이 힘들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열두 살의 모나리자’는 문학상 최종심에서 안타깝게 밀렸었다. 또한, 책을 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서 원고를 보냈는데 출판사가 이사 가는 바람에 무산되었었다. 이게 더 기가 막힌 사연인 것이 이사 들어온 곳도 출판사였다. 그러니까 같은 장소에 다른 출판사가 들어와서 엉뚱한 동화와 상관없는 출판사의 엉뚱한 편집자에게 원고가 전달되어 버린 것이다. 이 어이없는 우연으로 원고는 사라졌고, 책으로 나올 기회도 날아가버렸다. 아내는 이 기구한 상황을 여러 번 속상해하며 토로했었다.

‘마루타 소년’은 나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초고를 써 놓았었는데, 이걸 청소년용 장편으로 고쳤다가, 분량을 줄여 어린이용 중편으로 줄였다가, 다시 어린이용 장편으로 고쳐 썼다. 책으로 나오기까지 7년을 붙들고 있었던 작품이다. 거절과 고쳐쓰기의 반복으로 쓴 책이다. 나중에 ‘아이앤북’ 출판사에서 두 작품이 모두 출판되면서 마음의 응어리가 많이 풀리기는 했다.

곁에서 지켜보면서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지형씨가 가장 많이 성장한 부분이 있다면 ‘거절을 다루는 모습’에 있다.

처음에는 거절당함을 견뎌하지 못했던 사람이 어느새 상대가 거절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작품과 작가 자신의 거리를 적당하게 가깝게 유지하는 모습을 보았다.

물론 매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원고를 쓴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을 아낀다. 하지만 그것을 출판사에 보내 놓고는 덜 초조해하게 되었다. 거절의 메일이 오면 당연히 무척 속상해했다. 울기도 했고, 화를 내기도 했으며, 자신의 글이 그렇게 별로냐며 우울해하기도 했다. 할 건 다 한 셈이다. 다만 이 상황을 좀 더 유연하고 편하게 받아들이고, 견뎌내게 된 것이다.


동화작가인 아내를 지켜보면서 내가 배우게 된 것은 이거다. 진짜 성장은 거절에 속상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절당한 상태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이전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자신을 되찾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지형씨가 거절당함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되돌아온 피드백을 꼼꼼히 살피고,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도리어 거절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심지어 사람의 관계에서도 그러더라.)

‘얼굴 시장’이라는 작품을 낼 때 그랬다. 처음에 단편으로 쓴 작품이었는데, 좋은 편집자님을 만나 장편으로 고쳐서 책을 내기로 했었다.

이미 ‘마루타 소년’을 쓰면서 단편, 중편, 장편을 쓰는 것에 훈련이 된 상태였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작품을 쓰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한 번 출판이 무산되었다.

무척 공을 들였기에 기대하고 있었지만 또다시 세상에 나오는 것이 거절당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물론 당장은 속상해했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 상태가 이전에 비해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아내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글을 고쳤고, 결국 또 다른 출판사(꿈초)를 찾아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꿈초에서는 지형씨의 작품을 정말 좋아해 주셨고, 재밌는 작품이라고 칭찬해주었다. 거절을 이겨내고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았기에 지형씨는 더 기뻐했다.

생각해보면 이 무렵 지형씨는 운동과 규칙적인 글 쓰기 시간을 확보하겠다며 노력하던 시기다.

다리를 찢고, 스트레칭을 하고, 카페로 나가서 하루에 8시간은 앉아서 글을 쓰는 시간을 계속했었다.

정신은 신체를 지배하지만, 동시에 신체는 정신을 일깨우는 모양이다.

아내는 거절당한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넣지 않고, 몸을 움직여 그 상황을 딛고 넘어서는 느낌이었다.

거절당해 괴로울 때면 위축되고 우울해서 동굴을 파고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고 싶어 진다. 그럴 때 몸을 움직여서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꽤 유용하다는 것을 지형씨를 관찰하며 알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하면서 거절당함을 극복해나가는 모습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다.

위대한 사람에게는 거절을 위대한 방법으로 극복하겠지만, 평범한 사람에게는 평범한 방식으로 거절과 함께 살면서 아동 바동 하면서 넘어가고, 비켜가면 될 일이다.

아내의 성장이 기쁘지만, 내가 곤란해졌음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 여자는 나의 거절 따위 당당하게 거절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과 회유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임지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제길.


“8700원입니다. 해피포인트 카드 있으세요?”

“핸드폰 번호로 해주세요.”

“네. 여기 키패드에 입력해주세요.”


결과는 이렇다. 이 엄동설한에 재활용 쓰레기 더미를 가져다 버리고, 빵가게에 심부름당한 내가 있을 뿐이다.

빵 봉지를 들고 터덜터덜 걷다가, 문득 이제 나도 좀 성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작가를 향한 나의 거절을 거절당한 이 불합리한 상황에 나 자신을 계속 놓아두지 않기로 했다.

빵 가져다주고 얼른 짐 챙겨서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와야겠다.

일단 나의 성장은 임작갑의 눈에 띄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이것은 현실 도피나 도망이 아니다.

거절당함에 당당한 나를 찾기 위한!
한 남자의 그레이트한 퍼스트 스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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