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함께하는 우정
서울에는 환경 재생을 하겠다고 만들어진 생태 공원이 여러 개 있는데 특이한 이력이 눈에 띄는 장소가 있다. 옛날에는 빼어난 풍광 때문에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던 한강의 봉우리섬이었는데 이후 수돗물 정수장으로 사용되다 폐쇄되고 다시 친환경 공원으로 문을 연 곳이다. 일명 ‘물의 정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선유도공원’이다.
선유도공원역에서 내려 ‘선유도공원 방면’이라고 쓰인 출구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작더라도 섬이니 어디서든 다리를 건너야 할 것 같았다. 조금 가다 보니 ‘선유교’라는 다리가 보였다. 붉은색 우레탄이 깔려있고 아치형인데 올라가니 무서웠다. 저 아래 흐르는 한강이 나더러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잡아먹을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로를 격려하며 겨우 다리를 건너 선유도에 도착했다.
돌아다니다 보니 공장에서나 볼 법한 콘크리트 구조물과 정수 시설의 흔적이 있어 지나간 것을 지나간 채로 보존한 느낌이었다. 옆에 누가 있으면 “여기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저기는 과거에 무엇을 하던 곳이었을까?” 하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걸게 될 것 같았다. 규모는 작지만 메타세쿼이아길, 수생 식물원, 녹색 기둥의 정원, 선유도 이야기관, 선유정 등 둘러볼 시설이 많아 지루할 새가 없었다. 미로처럼 구석구석에서 새로운 공간이 계속 나타나니 구경거리도 많아서 친구랑 함께 있으면 대화가 끊어질 틈이 없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선유도 건널 때 의지가 많이 되었을 것 같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데도 외딴섬 같은 느낌이 있고 혼잡스럽지 않아서 조용히 시간 보내기에 적합해 보였다. 중간중간 놓여 있는 흔들의자형 그네에 혼자 앉아 책을 읽거나 경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자주 눈에 띄었다. 친구랑 둘이 오붓하게 걷다가 눈에 띄는 아무 벤치에나 앉아서 간단히 음료나 간식을 먹으며 조용히 얘기 나누고 싶은 길이었다.
다시 선유교 건너는 걸 피하고 싶어서 선유도공원 입구 쪽과 연결된 양화대교를 건너 섬을 나오기로 마음먹었다. 다리 중간에 너무 멋진 ‘카페 진정성’이 보였다. 바로 전 선유도공원 내 카페 나루를 들르지 않았다면 여기서 커피 한잔 했을 텐데. 옆에 친구가 있었다면 누군가 선동하여 이 근사한 한강뷰 카페에 틀림없이 들어갔으리라.
친구와 함께라면 더욱 좋았을 선유도길을 혼자 걷다 보니 어네스트(곰)와 셀레스틴(생쥐)이라는 만화 영화 속 동물 친구가 그리워졌다.
제목은 두 친구의 이름 그대로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인데 픽사나 드림웍스에서 제작한 화려한 3D, 실사 애니메이션이 대세인 요즘 2D의 수채화풍으로 만들어진 만화이다. 가족들은 판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가난한 길거리 음악가를 선택한 어네스트와 화가를 꿈꾸지만 치과의사가 되기를 강요받는 셀레스틴의 각별한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긴박한 순간에 도움을 주고받은 것을 계기로 둘은 절친이 되지만 서로 다른 지상과 지하 세계에 산다는 이유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편견이 둘의 우정을 방해한다. 하지만 예술적 기질에서 통하는 두 친구는 서로의 꿈을 이해하고 능력을 믿어주며 우정을 쌓아간다.
어네스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음의 높낮이에 맞추어 셀레스틴의 수채화가 춤추듯이 그려지는 장면은 순간 몰입도가 최고였다. 이 영화는 아날로그 감성으로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말라’, ‘다르다고 차별하지 말라’, ‘진심으로 소통하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힘주어 내게 말했다. 내 기억 속에 꿈과 편견, 우정에 대한 메시지를 진솔하게 전달한 영화로 남아 있다.
실화 기반의 버디 무비도 생각났다. 교양과 품위를 갖춘 천재 피아니스트(돈셜리)와 거친 말투와 주먹이 앞서는 운전기사(토니발레롱가) 사이의 특별한 우정을 다룬 영화이다.
제목 <Green Book>은 1936년부터 1966년 사이에 발행되던 책으로 흑인들이 출입 가능한 숙소와 음식점이 기재된 흑인 전용 여행 가이드북을 지칭한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1960년대 만연했던 미국 내 인종 차별의 심각한 상황을 배경으로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우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혈질이지만 의리 있고 바르며 따뜻한 토니의 인간적인 매력과 음악가로 많은 것을 성취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돈 셜리의 외로움이 짠하게 마음에 남는다. 풍경과 의상, 그리고 음악이 1960년대로 돌아갔다고 착각할 만큼 잘 재현되었다. 배우(비고 모텐슨, 마허샬라 알리)의 실감 나는 연기도 놀라웠고 기억해 두면 삶에 도움이 될 유익한 대사도 많았다.
“쇼팽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당신의 음악은 당신만 할 수 있어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외로워도 먼저 손 내미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성격과 취향이 판이한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인생과 가치관을 변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과정과 이 우정이 5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국어사전에서는 친구를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내 마음속 사전에서 친구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아도 시간을 내서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학교 동창, 회사 동료, 주변 지인을 폭넓게 친구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해관계를 따지고 목적이 있을 때만 찾는다면 친구라고 얘기하기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다.
친구를 만나는 시간에 자신의 취향을 살피고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줄로 안다. 그러나 사람은 늘 만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잠시 스쳐가는 인연을 맺기도 하고 서로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빈번한 모임에 서로 다른 성향 맞추느라 과도하게 시간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사람은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상대방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나이가 들며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란 마음이 통하는, 깊이 신뢰하는, 본받고 싶은, 중요한 문제에 조언하는, 발전하도록 돕는, 잘 되기를 기원하는, 좋은 기운을 나눠주는, 함께 하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이런 존재가 있다면 행운이겠지만 나 또한 어떤 이에게는 의미 있는 사람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