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의 교훈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처럼 우리는 순간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자신을 만들어가고 모든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오늘의 산책로는 전망이 좋은 길, 계곡이 좋은 길, 걷기 편한 길 등 몇 가지 선택지 중에서 고민한 끝에 시민들에게 다시 돌아온 ‘청와대 앞길’을 택했다.
청와대 한 편의 청운효자동 주민센터에서 시작하여 반대편 삼청동 주민센터로 빠지는 길인데 입소문을 타고 관광객들에게도 명소가 된 걸로 알고 있다. 1968년 무장공비 습격으로 폐쇄된 후 50년 만에 전면 개방되었던 청와대가 다시 문을 닫게 되긴 했지만 앞길까지 전면 통제하지는 않았다.
이 길로 들어서자마자 무궁화동산에서 꽃구경을 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출입이 금지된 궁정동 안전 가옥이었는데 문민정부 수립 이후 청와대 앞길이 개방되면서 시민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담장이 자연석으로 되어 있고 무궁화와 소나무 등으로 화단을 잘 꾸며 놓았고 군데군데 벤치도 있어서 휴식하기에 좋았다. 무궁화동산 대각선 방향으로 있는 작은 공원을 지나 청와대로 쪽으로 들어가니 아름드리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어 걷기에 그만이었다. 경복궁 북쪽 문인 신무문과도 연결되어 있어 경복궁 돌담을 따라 걷는 궁세권 산책길이었다. 삼청로 방면에는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도 있어 예술품 감상도 가능했지만 나는 산책만 할 작정이었기에 관람하지는 않았다.
오늘 걷기 코스를 고를 때 장소가 도심 한가운데라 번잡스럽고 북적이지 않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청와대 앞길로 정한 건 결국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늘이 아니라 내 인생 전체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은 무엇이었는지 돌이켜보니 첫 직장을 그만둔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직장을 두 군데 다녔는데 첫 번 째는 합성섬유 제조 회사였다.
그 당시는 대부분의 회사들이 여성 직원을 잘 뽑지 않았다. 법적으로 하자가 있으면 안 되니 사원 모집 공고에 공문화하지는 못했지만 여자 지원자가 원서를 내면 받자마자 검토도 하지 않고 찢어 버린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는 고분자 재료 개발에 관심이 있어 대학원에 진학했고 졸업 후 전공 관련 기업체에 소속되어 연구한 기술을 실용화하고 싶었다. 한 회사에 지도교수 추천까지 받아 입사 지원서를 냈는데 50명 모집에 5000명이 지원했다는 인사 담당자의 설명을 들었다. 최종 합격자 중 여자는 단 3명이었다. 회사의 업과 관련된 의류학 전공자 1명, 일본과 교류가 많은 회사이니 일어 능통자 1명, 섬유 재료 연구원 1명이었다. 여직원은 구색 맞추기용으로 최소한만 선발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나는 이 세 명 중의 한 명이 되어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연구소는 집에서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경기도에 있었다. 하루 3~4시간을 길거리에 뿌리고 다녔다. 출근 시간에 붐비는 버스와 전철로 사당까지 가면 이미 진이 다 빠졌다. 거기서 다시 좌석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린 후 또 한참을 걸어야 했다. 좌석버스가 입석까지 만원이 되어 탈 수 없는 날엔 지각을 면하기 위해 과속으로 지름길을 달리는 총알택시를 탔다. 지금처럼 카카오 T 같은 앱은 없었으니 목적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동승해서 택시를 잡는 시간과 요금을 절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무실 환경도 우울했다. 허허벌판 공장 지대 맨 끝 언덕에 컨테이너로 만든 건물이 덩그러니 있었고 입구로 들어가면 테스트를 위한 설비들이 복잡하게 널려 있어 보기만 해도 심란했다. 문 안쪽에는 근무자의 서열에 따라 배치된 책상만 삭막하게 놓여 있었다. 연구소 앞은 시멘트 바닥이었고 그 흔한 카페 하나 없었다.
회사에서는 옷도 내 맘대로 입지 못했다. 연구소는 공장과 인접해 있었는데 직원 간 위화감을 조성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모두 똑같이 작업복 같은 제복을 입었다. 최소한의 자유도 박탈 당한 느낌이었다.
일도 재미없었다. 기대했던 신소재 연구라기보다는 공장의 신제품 제조를 보조하는 수준이었다.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계속 있으면 몇 년 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결국 입사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퇴사를 결심했다. 실행에 옮기기 전 사전 조사가 필요했다. 유망 산업 관련 정보를 찾아봤고 내가 일하고 싶은 영역 두 군데를 정했다. 다음은 종사하는 분야를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봤다. 여러 부문으로 진출이 가능한 MBA 과정을 밟으면 어떻겠냐는 언니의 조언을 듣게 됐다.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유학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원거리 회사를 다니며 퇴근길에 강남역에 있는 영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계획이 조금씩 구체화되면서 집중적으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자 사직서를 제출했다. 입사한 지 1년 반 만이었다.
퇴사를 알리자 이유를 묻거나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장 가는 것도 아니고 이제부터 준비를 한다고?”, “너무 늦은 나이 아닌가?”, “영어를 잘하나 보네!”, “부모님이 개방적이시군. 혼자 떠나는 유학을 허락하시고”, “유학생 마약 문제가 심각하던데...” 걱정인지 비웃음인지 알기 어려운 말이 대부분이었고 응원의 말은 듣지 못했다. 나는 ‘20대 중반이 공부하기에 많은 나이라고?’, ‘60세 넘어 학위를 따는 사람도 있던데?’라고 스스로 격려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악담 같은 참견은 무시하고 “시험 보고 원서 내고 입학 허가를 받는 절차가 1년은 걸려요”, “학위 특성상 업무 경력이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선발한대요”라고 필요한 말만 했던 걸 여전히 기억한다. 나는 그들의 말에 의기소침해지거나 휘둘릴 만큼 물렁하진 않았다.
본격적으로 유학 준비가 시작되었다.
거의 모든 학교의 경영대학원에서 요구하는 TOEFL(Test of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과 GMAT(Graduate Management Admissions Test) 시험을 여러 차례 봤고 제출할 에세이도 썼다. 전화 인터뷰를 요청하는 학교가 한 군데 있었는데 시차가 있다 보니 늦은 밤에 약속이 잡혔다. 나는 예상 질문을 모두 뽑아서 영어로 답변을 만들어 놓았다. 혹시 당황하면 보고 읽기라도 하겠다는 각오로 방바닥에 한 장씩 한가득 펼쳐 놓고 전화 오기를 기다렸던 생각이 난다. 다행히 대단한 질문은 없었고 대부분 알아듣고 답변했다.
나는 1년 후 계획대로 유학을 갔다.
IT 분야로 Career를 전환하는 것이 1차 목표였으므로 Engineering 영역에 강세를 보이는 학교를 택했다. 심야 전화 인터뷰를 했던 학교였다. 경영정보시스템, 정보 기술과 경쟁 우위 전략, 시스템 분석과 설계, 데이터베이스 시스템, 의사결정 및 전문가 시스템 등 IT 관련 과목을 많이 수강했다. 2년 동안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토론 참여가 거의 필수인 20여 개 과목을 수강하고 프레젠테이션 하고 리포트를 제출하고 시험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열정 하나로 낙제하지 않고 꾸역꾸역 해냈다.
유학생 선배님 한 분이 몇 가지 조언을 해 주셨는데 내가 IT 분야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어떤 IT 회사의 안내 책자를 읽어 보라며 주셨다. 10년도 안된 신생 기업으로 발전 가능성이 많아 보였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지긋지긋한 남녀 차별도 없을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참신한 회사가 있었어? 마음에 쏙 들었다. 요즘 청년층이 Google을 보는 기분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홍보 책자의 거품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2년 과정의 마지막 학기 때쯤으로 기억한다. 내가 안내서를 보고 마음에 들어 했던 회사의 리크루팅팀이 우리 학교를 방문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연히 나는 인력 채용을 위한 인터뷰에 참가했다. 면접관이 4~5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돌아가며 다양한 질문을 했는데 한 가지 질문은 세 분이 똑같이 세 번을 물어봤다. 면접 후 편안한 분위기에서 피자를 먹으러 갔는데 그때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피면접자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의도적으로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고 했다. 미국 생활의 기본인 자동차 없이 지내는 점도 학우들의 차를 얻어 타며 견딜 만큼 친화력이 있는 것으로 좋게 해석해 주셨다. 1년은 학교 내 기숙사에서, 나머지는 도보로 통학이 가능한 아파트에서 살았고 마트까지 학교 셔틀이 있었기에 차 때문에 신세를 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찌 됐건 나는 그분들의 점검 기준을 통과한 듯했다.
얼마 후 합격통지서가 등기로 배달되었다. 나의 전공 및 분야가 회사의 사업 추진 방향과 일치한다고 판단되어 선발하게 되었으니 귀국 후 제출 서류를 들고 담당자를 찾아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낡은 통지서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의 증빙 같은 느낌이 들어 버리지 못했다.
이렇게 나는 내가 원하던 IT 기업에 입사했고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나의 첫 직장은 대기업이었으나 지금은 해체되어 없어진 기업집단에 속한다. 내가 만일 퇴사하지 않고 어떻게 되겠지 하며 뭉그적거리고 있었다면 이후 오랫동안, 어쩌면 지금까지 곤란한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결과를 놓고 보면 나의 첫 직장 선택은 실패였다. 얼마 안 가 퇴직했으니 말이다. 다행히 퇴사 결정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의 소리가 전하는 대로 움직였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그 도전은 내 인생의 3분의 1을 바꿨다.
살다 보면 결정이 필요한 순간이 올 수밖에 없고 어떤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면 그에 따르는 위험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먼 훗날 더 큰 위험이 닥칠 수도 있음을 직접 경험했다.
나는 앞으로도 생각만 하고 망설이다 하지 않은 일 때문에 세월이 흐른 뒤 후회하기보다는 그냥 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지금 아니면 영원히 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선택이 내 인생의 나머지를 바꿀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