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IT아빠모임
2016년 한국의 사교육비 총액은 18조 원이었다. 국방예산의 절반에 육박하는 돈이 매년 학원과 과외에 쏟아지고 있었지. 초등학생 한 명당 월 평균 24만 원, 중학생 27만 원, 고등학생 26만 원. 문제는 평균이 실체를 가려준다는 점이다. 대치동과 목동에서 아이 한 명에 월 200만 원 이상을 투자하는 가정은 드물지 않았다. 쌍둥이 아들의 학원비가 월 300만 원이라는 그 아버지의 고백은 평균이 아닌 현실의 숫자였다.
이 돈의 대부분은 아이의 호기심이나 창의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신과 수능 점수를 올리기 위해 썼다. 앞 장에서 본 PISA 62위의 자아효능감. 그 숫자를 만드는 데 한국 사회가 연간 18조 원을 투자하고 있었던 거다. 세계 1위 성적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연 18조. 세계 최하위 자아효능감을 만드는 비용도 연 18조. 같은 돈이다. 이 역설을 이 자리의 아버지들은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다. 데이터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한 아버지가 말했다. "저도 알아요. 이 교육이 아이한테 좋지 않다는 거. 창의성 죽인다는 거. 그런데 다른 길이 있어요? 수능 안 보고 갈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저도 가고 싶죠. 그 길을 아무도 안 보여주니까 결국 학원을 보내는 거예요. " 말이 끝나자 침묵이 흘렀다.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침묵 안에 한국 교육의 비극이 압축되어 있었다. 문제를 아는 사람들이 해결책을 모르는 상태. 시스템을 의심하면서도 시스템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태. 서른 명의 엔지니어가 버그를 발견했다. 다만 이번 버그는 핫픽스로 고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더 씁쓸한 것은 시간이었다. 2016년 한국 남성의 연간 노동시간은 OECD 평균보다 300시간 이상 길었다. 단순 계산으로 매일 한 시간 반씩 더 일한다는 뜻이지. 그 시간만큼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다. 아이 교육에 투자할 에너지가 사라진다. 그래서 학원에 위탁한다. 시간이 없으니 돈으로 대신하는 거야. 한 아버지의 말이 떠오른다. "출근할 때 아이가 자고 있고, 들어오면 또 자고 있다. " 이것은 나태함이 아니다. 구조다.
우리 아버지 세대에는 이런 고민이 없었다. 아니, 고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답이 명확했지. 좋은 대학에 보내면 된다. 좋은 대학을 나오면 좋은 회사에 들어간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면 안정된 인생이 보장된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 공식은 대체로 작동했다. 산업화 시대의 성공 공식. 공장에 전기가 들어오면 모든 기계가 돌아가듯 좋은 대학이라는 전원만 꽂으면 인생이라는 기계가 돌아갔다. 이 공식 덕분에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2016년의 아버지들은 이 공식이 깨지고 있다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었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안 되는 시대. 좋은 회사에 들어가도 10년 뒤를 보장할 수 없는 시대. IT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어제의 최첨단이 오늘의 레거시가 되는 속도를 매일 경험하니까.
대화는 아이에서 자기 자신으로 넘어갔다. 한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학교 다닐 때 공부가 즐거웠던 적이 없어요. 그냥 해야 하니까 했죠. 대학 가야 하니까, 취직해야 하니까. 그런데 지금 내 아이한테 똑같은 걸 시키고 있잖아요. 내가 싫었던 걸 내 아이한테 물려주고 있는 거예요. " 여러 아버지가 씁쓸하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한숨에 가까운 소리였지.
대물림. 자기가 받은 교육의 고통을 아이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자각. 그것은 죄책감이라기보다 무력감에 가까웠다. "시스템이 틀렸다는 걸 아는데, 이 시스템 밖에 설 용기가 없다." 이것이 2016년 한국 학부모의 가장 정직한 심리 상태였을 것 같다.
또 다른 아버지가 덧붙였다. "삼성에서 10년 일했는데, 회사에서 정말 필요한 능력은 학교에서 배운 게 아니었어요. 문제를 정의하고, 팀을 이끌고, 모르는 걸 빨리 배우는 능력. 그건 수능에 안 나와요. 그런데 내 아이한테는 수능 준비를 시키고 있다는 거잖아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기에 더 선명하게 보이는 간극. 학교가 가르치는 것과 세상이 요구하는 것 사이의 거리. 하지만 그 간극을 아이에게 건너뛸 다리를 놓아줄 방법을 아무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