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바다'

이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

by 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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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모가 자신의 엄마, 즉 할머니에게 쓴 편지에서부터다. 은미는 그 편지를 받은 할머니의 부탁으로 고모를 찾아가게 된다. 먼 나라 미국으로 친구 민이와 함께 말이다.

누군가를 속이고 누군가는 속고, 그 거짓말 안에서 애틋함과 애처로움, 혹은 그리움을 느낀다. 또 다른 이는 뿌듯함과 죄책감, 혹은 안쓰러움까지 느낄 수 있을 거다. 은미도 고모도 그리고 민이도 모두 제자리에서 제 할 몫을 하고 있음을.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이상하리만치 저 관계 안에 스며들 수 없었다. 내가 책을 읽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작품 속 인물에게 이입하고 또 다른 삶을 경험하고 살아보기 위해서다. 우리의 몸은 하나이고 경험할 수 있는 한계는 정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한계에 멈추는 것은 어리석다. 다른 삶을 경험할 수 있는 매개체는 우리 곁에 무수히 존재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곧 책이다. 그러나 저 관계들 안에 내가 놓일 수 없었던 것은 막대한 사랑과 사랑이 모여졌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한 발자국 떨어져 그들의 이야기를 관전하고 응원하고 이내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기자가 되기 위해 시험을 보고 매번 낙방하는 은미, 태어나자마자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쥐고 태어난 민이, 우주 비행사가 된 고모의 만남을 이야기해 보자. 고모는 결혼, 사회적 성공 따위에 실패한 인물이다. 이렇게 정의하면 정말 ‘실패’한 인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고모는 자신의 그 유약한 부분을 아름다운 거짓말로 승화시켰다. 미국에서 우주 비행사가 되어 우주를 열심히 유영하는, 그런 아름다운 거짓말로 말이다. 그렇게 가족과의 인연을 끊고 아들하고도 연락하지 않는다. 오롯이 엄마에게 편지를 부치는 일만 한다. 그것도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엄마는 어디에도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고 오랫동안 혼자만이 간직하고 있다.

죽기 위해 약국 여럿을 다니며 모은 감기약을 손에 가득 쥔 은미에게 할머니는 부탁한다. 미국에 있는 너희 고모를 만나고 오라고. 은미는 각별한 친구 민이와 함께 미국으로 향한다. 긴 활주 끝에 만난 고모는 여전했다. 여전히 어른이었다. 다만, 은미가 고모를 만나고 나서야 고모의 거짓말은 탄로가 났다. 우주 비행사가 아닌, 사실은 그저 샌드위치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고모의 하루는 사실 단조롭기도 했다. 앉지도 못하고 바쁘게 일하고, 매일 몇십 개의 샌드위치를 어딘가에 보내고 있고, 엄마에게는 그럴싸한 편지를 부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은미는 고모와 함께 지내며 갖가지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을 거다. 고모의 거짓말, 아픔, 남자친구, 아들인 찬이까지. 은미가 고모한테 묻는다. 왜 할머니에게 가짜 편지를 썼느냐고. “만약에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런 작은 위안도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잖니” (154쪽)라고. 나는 고모의 말에 동의했다. 나도 살아가며 거짓말을 내뱉은 순간이 있고, 그 순간이 죄책감으로 다가올 때도 있었고 후련함으로 다가왔을 때도 있다. 거짓말은 때론 우리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전해주기도 한다. 근데 생각해 보니 고모의 말이 맞는다. 남들이 원하는, 그리고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면, 나의 거짓말이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었다고 말이다.

은미는 고모에게 찬이의 지난 예쁜 과거를 전해준 후, 이 모든 사실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찬이에게는 사실을, 할머니와 가족들에겐 거짓을 내뱉는다. 그 또한 그들에겐 작은 위안이 될 테다.

어릴 적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은미에게 고모는 말한다. “내가 장담하는데, 은미야, 넌 정말 멋있는 어른이 될 거야.” (61쪽) “ 내가 아는 매력적인 사람들 중에 거짓말에 서투른 사람은 하나도 없어. 정말이야. 거짓말을 잘하는 순서대로 재미있는 어른이 될 수 있다고나 할까?” (62쪽) 초반부에 나오는 장면이다. 나는 후에 이 장면의 진짜 뜻을 책장을 덮고 나서 완연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는 과연 재미있는 어른이 되었나?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졌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난 꽤나 재미있는 어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고루하고 지루한 어른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작품에서 민이를 빼놓을 순 없다. 현실과 이상의 거리가 너무나 멀고, 겉모습과 내면의 풍경이 상이하고, 그래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민이의 현 상황을. 남자로 태어난 민이는 치마와 구두 그리고 화장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 성향은 아주 어릴 적부터 두드러졌다. 그것을 누구보다 일찍 파악한 건 은미와 은미의 가족들이었다. 여자가 되기를 소망했다. 호르몬 주사를 맞고 싶어 했다. 은미의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무너지기도 했다. 내가 민이라면, 나도 그 상황에서는 은미가 미웠을 거다. 은미는 여자고,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원하던 것을 손에 쥔 채 태어난 이다. 호르몬 주사를 맞고, 남성성을 제거하기 시작하면 물론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겠지만, 그 용기와 결단력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민이에게 나는 그저 따뜻한 손길을 건네고 싶었다. 걸어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들지 알기에.

민이는 미국에서 돌아와 병원으로 향했다. 호르몬 주사의 부작용에 대하여, 별 이상이 없다면 언제쯤 수술이 가능하며 국내와 국외 병원 이용시 장단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은미와 함께 들었다. 그리고 은미는 민이가 간 수치 거마와 임상 심리 검사를 받기 위해 대기실 의자에 홀로 앉아 있으며 생각했다. 누구도 원하는 인생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해서 삶이 낯설고 불편한 영화처럼 느껴진다고.

세 번째 주사를 맞고 진이 빠져 이틀간 내리 잠을 자다 깬 민이가 말한다. 은미는 작가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나는 은미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날 병원에서 느꼈던 낯설고 불편한 감정이 휩싸인 영화가 아닌, 보다 산뜻하고 아름다울 수 있기를. 그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되면 좋겠다고 말이다. 어쩌면 모든 소설은 허구이다. 그 허구 안에 진실을 숨겨 놓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그 진실은 오롯이 작가만이 알고 있다.


인생에는 실패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서로에게 조금씩 작은 위안을 건네고 응원을 해주고 그렇게 다시금 꿈꾸는 것. 그리고 사랑할 것. 사랑에 실패해도 다시금 일어나 사랑할 것. 사랑은 때론 우리를 무너뜨리겠지만, 많은 순간 우리를 살아가게 할 거다. 그러니 두려워도 한 번 더 사랑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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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파란색과 하얀색이 뒤섞인 아름다운 구슬 같았어요. 아니면 한입에 쏙 들어오는 알사탕. 제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풍경이었죠. 저는 소리 없이 눈을 깜빡이며, 저 알사탕 안에 있을 점보다 작은 제 생의 흔적들을 찾아보았어요. 글쎄. 그건 졸렬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더군요. 알사탕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간사, 말이에요.
p. 10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은데, 그게 늘 우리의 밑그림을 넘어서니까 당황하고 불신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네가 나를 보러 와준 것처럼 기대 밖의 좋은 일도 있는 거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고. 고모는 그걸 알기 때문에 세상에 빚진 것이 없어."
p. 177


누구도 원하는 인생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해서 삶이 낯설고 불편한 영화처럼 느껴졌다.
p.188


"작가들은 내가 아는 최악의 인간들이야. 소설가는…… 그중에서도 최악이지. 네가 그 안에 끼지 못할 이유가 뭐야?"
p.189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그저 바라볼 뿐이죠. 하지만 이 세계가 오해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면 분명히 신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분을 향해서 큰 소리로 노래라도 불러드리고 싶어요. 지구를 벗어나면 우주, 우주를 벗어나면 또 무엇이 있을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거든요. 언제든지 명령이 떨어지면 저는 이곳에 완전히 정착할 준비를 시작해야 돼요. 그때가 되면 더 이상 편지는 쓰지 못할 거예요. 지구와 달을 오가는 우체부는 없으니까요. 만약에 그런 날이 오더라도 엄마, 제가 있는 곳을 회색빛의 우울한 모랫더미 어디쯤으로 떠올리진 말아주세요.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으로, 아, 그래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밤하늘의 저 먼데를 쳐다보면 아름답고 둥근 행성 한구석에서 엄마의 딸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때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언제나 엄마가 말씀해주셨잖아요?
p. 19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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