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서툴렀던 나의 유년에게
서툴렀지만, 눈부시게 만개한 생애, 그러니까 해미의 유년에 대해서 우리는 차근히 짚어보고자 한다. 해미가 여태껏 살아온 걸음걸음을 하나씩 순서를 매겨 말할 때면, 가슴이 저릿하다. 그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해미의 결심이 못내 어여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서툴렀기에 유년이고, 눈부셨기에 청춘이었을.
완연한 성장 소설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해미는 어린 시절, 개의치 않은 사고로 인해 친언니를 잃게 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졌을 거다. 그 슬픔을 해미는 모두 직면하게 되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게 된다. 힘겨움과 슬픔을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삼켜내며 입 밖으로는 해사한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국을 떠나 모든 걸 훌훌 털고자 결심한 엄마를 따라 여동생 해나와 함께 독일 G시로 향하게 된다. G시에는 친이모 행자가 파독 간호사로 정착해 살고 있었다.
부모를 안정시킬 선의의 거짓말 신호탄은 이미 발사되었고 G시에서도 멈추지 못했다. 어린 해나를 챙겨야 했던 엄마, 걱정이 많은 엄마, 나에게는 100%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지 못한 엄마를 위해 해미는 성심성의껏 거짓말을 내뱉게 된다. 읽는 내내, 해미는 나에게 안쓰러움을 남겼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선 자기가 ‘괜찮은 척’ 행동하고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막중한 책임감으로 전해졌을까. 그리고 그런 해미에게 행자 이모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린 해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보듬어주는 진정한 어른이 존재했다는 것을.
해미는 그곳에 교포 2세 친구인 레나와 한수를 사귀게 된다. 그들은 아픈 한수 엄마, 순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를 통해 뭉치게 된다.
"나는 엄마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첫사랑에게 엄마를 만나러 오라고 편지를 보낼 거야. 그 편지를 써줄 사람이 필요해.”
P.56
한수는 아픈 엄마를 위해 첫사랑을 찾아주리라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선 한국어를 쓸 수 있는 해미가 필요했던 거다. 우선 첫사랑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선자 이모의 일기를 훔쳐 읽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한국어를 읽을 수 있었던 해미가 몫을 했다. 일기를 읽으며 해미는 일기 속에서 이모가 말을 거는 상대는 첫사랑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슬픈 연서였으니까. 세 사람은 만나는 날을 지정해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에 대하여 추적하기 시작했다. G시에서 만난 친구지만, 해미는 두 사람을 각기 다르게 정의했다. 레나를 좋아하는 일이 아침햇살 아래 부드럽게 몸을 드러내는 연둣빛 들판처럼 완만한 것이었다면, 한수를 좋아하는 건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슬픔과 벅차도록 밀려오는 기쁨의 계곡 사이를 곡예하듯 걷는 현기증 나는 일이었다. 나는 중간중간 이런 대목에서 작가에게 묻고 싶다. 작가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길래 이런 단어와 감정과 분위기를 담고 있는지 말이다. 하나의 문장으로 해미가 그들을 생각하는 감정을 아주 깊고도 깊숙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해미가 독일을 떠날 때까지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해미의 유년은 마냥 서글픈 눈물만 존재한 건 아니었다. 해미에게는 행자 이모가 있었다. 친구가 있다는 듯 거짓말을 했던 해미를 알고 행자 이모는 자연스럽게 레나를 소개해 주었다. 어린아이가 투정 부릴 수 있게, 더욱 솔직할 수 있게, 어른의 품에 안기고 기댈 수 있게 말이다. 옳고 그름을 따졌다기보단,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고 생각한다. 슬퍼도 울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 울어도 된다고 길잡이를 해주었다. 덕분에 해미의 유년 시절은 촘촘하고 차근하게 기쁨이 채워질 수 있었다.
유년에 행자 이모가 있었더라면, 현재에는 우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특히나 우재가 나오는 부분들을 가장 좋아했고 웃으면서 읽었다. 대학교 친구였던 우재를 우연히 사진전에서 재회하게 된다. 이들의 역사는 마냥 가볍진 않았다. 대학 시절, 가까운 듯 먼, 용기를 낸다면 한순간에 가까워질 수 있었던 관계가 용기가 없어 서서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단순하게 친구라고만 정의하기에는 감정적 교류가 오고 갔던 그런 사이였다.
해미는 우재와 연락하고 만남을 이어 나가면서 마냥 단순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 만날 빌미를 만들고 연락을 쌓는다. 퇴사한 해미는 서울에, 약국을 개업한 우재는 제주도에, 우재는 경조사를 핑계로 해미를 보러 온다. 해미도 이것이 단순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다음 주에도 경조사가 있을 예정이냐며 넌지시 물어보기도 한다. 살랑이게 부는 이들의 사랑 내음이 독자에게 자꾸만 웃음을 짓게 했다.
퇴사한 해미는 돌고 돌아 다시금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를 찾기 시작한다. 선자 이모는 돌아가셨고, 거짓된 편지를 작성한 바가 있다. 그러니까 K.H.인 척, 슬퍼하는 한수를 위해 한 번 더 그럴싸한 거짓말을 했다. 다시금 일기를 펼치고, 어릴 때보다 더욱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한다. 잘 못 알고 있었던 정보는 수정하고, 수소문 끝에 K.H.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해미는 몇 번이고 K.H.에게 당신이 천근호가 맞는지 물었다.
해미가 놀란 까닭은 천근호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순자 이모의 첫사랑, 그리고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서로만 알고 있어야 했던, 끝끝내 닿지 못했던 아름답고도 아팠던 마음이었음을. 어른이 된 해미는 뒤늦게나마 상처를 직면하고 끝맺음을 맺었다. 천근호를 찾아가 순자 이모의 편지와 일기를 모두 건네주었다. 모든 걸 훌훌 털어 성장하고 새로운 시작의 신호탄을 알렸다.
백수린 작가의 단편집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감정을 장편 소설을 읽으며 배로 느낄 수 있었다. 깔끔하되 고운 문장들, 아름답고 다정한 문장들, 문장에도 선율이 있다면 백수린 작가의 문장은 계속해서 찾아 듣고 싶은 멜로디일 거다. 거짓말로 점철되어 엉킨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기까지의 여정을 열심히 응원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응원받고, 힘을 얻고, 무너졌던 마음을 다시금 일으켰다. 마음을 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해미는 해낼 수 있었다.
물론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도 응원했지만, 가장 응원했던 건 우재와의 관계였다. 다가가고 싶은 우재와 제자리걸음, 혹은 후퇴만 하는 해미의 끝은 부디 하나의 지점에서 연결되기를 소망했다. 해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선의가 가득했다. 그런데도 해미는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상처가 많은 해미는 자신이 우재에게 다가가면 더 한 상처만이 남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쉽게 열릴 수 없는 마음이다. 우재는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해미를 보러 오는 행동으로, 혹은 자신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라는 말로, 해미의 마음의 문을 수시로 두들겨 주었다. 그 두드림이 가닿은 건, 해미가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향함으로 알 수 있다. 끝내 두 사람이 어떤 관계로 발전했는지는 미지수지만, 나는 대학 시절과는 다른 정의를 내렸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해미는 성장했고 상처를 치유했으니까.
다정한 마음은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하던 백수린 작가의 문장이 아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거다. 선량함, 선의, 다정함, 따뜻함, 착한 마음 따위가 세상을 구할까? 생각했다. 물론 세상을 구하진 못할 거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은 나는 구원할 수 있었다. 아마 다른 독자들 또한 같은 생각을 지녔을 거다. 이 다정함 마음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란다.
[눈부신 안부] 코멘터리 북에서 작가는 이야기한다. “눈부신 안부가 종국에는 낙담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는 작지만 단단한 마음을 환기하게 해주면 작가로서 무척 기쁠 거예요.”
눈부신 안부를 전해준 백수린 작가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이제부터 조금씩 나아질 거야. 한 번에 괜찮아질 리는 없지만, 천천히 회복되고 있나 보다 싶은 날도 찾아올 거야. 그러니까 이모는 네가 씩씩하게, 이곳에서 잘 지내면 좋겠다.
p.24-25
"하지만 기억하렴. 그러다 힘들면 꼭 이모한테 말해야 한다. 혼자 짊어지려고 하면 안 돼. 아무리 네가 의젓하고 씩씩한 아이라도 세상에 혼자 감당해야 하는 슬픔 같은 건 없으니까. 알았지?"
p.25
그 아이들과 있을 때면 나는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나라에서 이주해 온 이방인도, 언니를 사고로 잃은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그곳에서 나는 그저 온전한 나였고, 레나는 온전한 레나였으며, 우리는 온전한 우리였다. 그런 시간은 이모가 시장에서 떨이로 사 온 무른 산딸기나 살구로 만들어주던 잼처럼 은은하고 달콤해서, 나는 너무 큰 행복은 옅은 슬픔과 닮았다는 걸 배웠다.
p.40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봄볕이 나뭇가지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거부하려 해도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무엇이든 움켜쥐도 흔드는 바람처럼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떨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p.100-101
레나를 좋아하는 일이 아침햇살 아래 부드럽게 몸을 드러내는 연둣빛 들판처럼 완만한 것이었다면, 한수를 좋아하는 건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슬픔과 벅차도록 밀려오는 기쁨의 계곡 사이를 곡예하듯 걷는 현기증 나는 일이었다. 평상시엔 수줍음 많은 아이가 이따금씩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할 때면 언젠가부터 뱃속이 천둥을 집어삼킨 것처럼 쿵쾅거렸다. 도대체 나는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렸던 걸까? 내가 한수를 특별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슬픔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면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p.104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p.109
내가 책상 위에 놓인 수국 화분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 건 지인의 집들이에 이어 친구 아이 돌잔치 때문에 서울에 왔다던 우재가 제주도로 돌아간 지 닷새가 지난 후였다. 우재가 서울에 네 번째로 방문했을 때 우리는 우재의 단골 식당에 들러 두부김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각자 한 병씩 마셨다. "이렇게 서울에서 열리는 경조사를 다 챙길 거면 그냥 서울에 사는 게 낫지 않았겠니?" 막걸리에 조금 취한 나는 우재를 놀렸다. "다음 주에도 경조사가 있을 예정이야?" 헤어지기 전, 내가 묻자 우재가 되물었다. "그럴 예정인데, 안 될까?" 그날 밤, 나는 지하철역 앞 도보블록에 작은 화분들을 늘어놓고 파는 청년에게서 수국 화분 하나를 충동적으로 샀다.
p.155-156
"아가씨가 찾으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긴긴 세월 지나 과거의 사람이 다시 찾아오는 건 틀림없이 근사한 일일 테지요."
p.278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늘 동경했던 시인이 되지도 못했고, 뼈아픈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어.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더 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
p.303-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