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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서하 Mar 22. 2024

쓸모의 늪


-태강은 가상의 도시입니다.




예정되어 있던 엄마의 항암이 모두 끝났다. 몇 주 뒤 검진에서 차도가 확인되면 그 뒤로 남은 건 수많은 약 복용과 건강관리, 그리고 사는 내내 지켜보는 일이 전부였다. 그렇게 말하는 의사 앞에서 엄마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어떤 의미인지 알아내기 위해 샅샅이 뜯어보며 머리를 굴렸다. 안도인가? 선생님 앞에서 긴장한 학생 같기도 하고? 의연한 척하지만 하나도 자연스럽지 않은 건 평균적인 엄마다움이었고 그걸 본인이 전혀 모른다는 점까지 가야 완전한 엄마다움이었다. 오늘 엄마는… 완전했다. 무방비 상태일 때가 되어서야 오롯이 자기자신이구만. 아픈 엄마를 조목조목 뜯어보는 내가 지긋지긋했고 그건 또 나다웠다.


의사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딸이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앞으로도 잘 챙겨드려요 하고 다음 베드로 넘어갔다. 고생은요 무슨 하고 웃어보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 방금 엄마같았네. 같은 얼굴을 한 모녀는 얼결에 눈을 맞춘 뒤 시선을 떨궜다. 고생했어 엄마. 집에 가자.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동안 의사의 목소리와 손의 감촉이 다시 감각되었다. 고생했네. 고생했네. 딸이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앞으로도. 앞으로도. 잘. 챙겨드려요. 챙겨드려요. 메아리가 끊기고 관념 속의 내가 대답했다. 저기요 고마웠고 다신 보지 말아요. 엄마가 말했다. 그래도 항암이 끝나서 다행이다 그치.




아무 것도 다행이지 않았다. 이 종료는 내게 그저, 태강에서 서울까지 왕복 9시간동안 병원을 오가는 짓을 더 이상 안해도 된다는 잠정적 선택이 주어진 것 뿐이었다. 그러니까 구태여 다시 말하자면, 물냄새에도 헛구역질을 하는 엄마를 씻기고 앉힌 뒤 1년이 지나도 어떻게 얹어놔야 할 지 모를 가발을 어떻게든 이마와 눈썹 사이에 적당히 모양을 맞추고 남아있는 어색함을 가리기 위해 갖은 모자를 그 위에 올려보다가 일곱개째가 되면 둘 다 지쳐서 아무 거나 쓴 채로 한여름에도 옷을 껴입혀 마스크를 씌운 뒤 기름냄새 가득한 낡은 버스터미널로 데려가 버스를 타고 또 다시 버스를 타고 또 버스를 타서 병원에 도착해서는 온종일 대기하다가 병실로 겨우 들어가 항암액을 꽂고 둘 다 지친 채 병상과 간병인 베드에 누워 미간을 있는 힘껏 찌푸린 채 잠에 드는 일을, 이제 그만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 뿐이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한자검정능력시험, 공모전, 인턴, 선배와의 만남…. 다들 어쩜 그렇게 일찌감치 목표를 세웠는지, 남들 한다는 거 다 하면서 지들 하고 싶은 것까지 야무지게 찾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그저 기가 찼다. 야, 너네 뭐 해야 할 지 모르겠다며. 좋아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며. 나는 그래서 우리가 같은 줄 알았잖아. 근데 아니잖아!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살 수가 있어? 선배들따라, 남들처럼 척척 다 해낼 수가 있는 거야? 막 자소서가 써져? 다른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지고 그래? 그렇게 살고 싶은 욕구가 생겨? 심장에서? 멱살 잡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쪽팔려서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렇지 않은 내가 나도 이해가 되질 않으니까. 똑같이 할 수 없는 나를 들킬까봐서.


다 남들이 되어버린 친구들 뒷통수를 보면서 내가 느낀 건 부러움이 아니라 유리감이었다. 내가 딛은 곳과 친구들의 땅이 다르다는 감각. 같은 세계에 있는 줄 알았는데 친구들은 콘크리트 혹은 하다못해 흙으로 된 땅이었다. 어쨌든 딛고 박차고 나갈 수나 있는 모양이었다. 종종 내 발은 보이지 않았다. 한 발 뻗어 딛고 나가고 싶은데 뻗을 수록 깊이 잠겼다. 애쓸 수록 이 곳에서 나의 쓸모는 자꾸만 잡아먹히는 것 같았다. 내가 선 곳이 늪이라는 감각이 계속되었다. 얘들아 먼저 가 나는 틀렸어. 자소서를 쓰며 울다가도 울음마저 계속 끊겼다. 도대체 뭐 쓸만한 게 있어야지. 쓸 것도 쓸모도 없는 내 젊은 날이 후회할 것도 없이 그저 한심했다. 유일하게 잘 하는 건 분노에 휩싸인 채 날을 새는 짓이었다. 서울 서쪽 구석의 자취방이 나의 늪이었다.




그러다 엄마가 유방암 확진을 받은 것이다. 늪에 갇힌 마음을 숨기고 오랜만에 엄마 얼굴을 보러 태강으로 내려온 날이었다. 볕 좋은 가을날이었고 데이트는 즐거웠다. 가벼운 마음으로 며칠 전의 검진 결과를 함께 들으러 갔을 뿐이었는데 엄마는 한참 나오질 않았다. 20분쯤 지나 초조해지기 시작했을 때 간호사가 어찌할 바 몰라하며 나를 불러들였다. 방금 전 담뿍 받은 가을볕은 온데간데 없이 파리하게 의자에 걸터앉은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의사가 이것저것을 내게 당부하는 동안 나는 내내 생각했다. 좆됐다.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좆됐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냥 다 좆됐다. 엄마가. 아니 사실은 나도. 나도 말이야. 좆됐다는 감각이 훗날 나를 얼마나 자책하게 할 지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내려와야겠네. 뭘 해보기도 전에, 뭐가 되기도 전에. 어째서였을까. 어째서 살던 곳에 돌아오는 일이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채 하는 추락이라 여겼을까. 케케묵은 짐을 정리하고 나눠주고 처분했다. 비가 몰래 흘리는 눈물처럼 사람 속터지게 내리는 날이었다. ktx를 타고 태강으로 향하는 동안 가진 적 없던 미래가 자꾸만 내 뒷통수를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 듯했다. 끈덕하게 달라붙어 목덜미부터 심장까지를 한 방에 부여잡고 질척거렸다. 늪에다 두고 온 미련과 대단했던 나의 기대, 그보다 훨씬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증오같은 것들이 얽혀 녹아있었다. 그래, 나는 확실히, 서울의 무어라도 되고 싶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아무 것도 되지 않았으면서 뭔가 크게 손해 본 것만 같았고 그 감각이 이어질 내 삶의 모든 것들을 조목조목 갉아먹기 시작했다.







엄마가 미안해라는 말이 듣기 싫었다. 엄마의 잘못이 아니므로. 그러나 그 말을 듣지 않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가까이서 학교를 다니던 남동생에겐 이 소식이 비밀이었고 근처 타지역에서 회사를 다니던 아빠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내게 내려오라 말했다. 모든 어른들이 다짜고짜 내게 전화를 걸어 네가 고생이 많겠다 수고해라 라고 말했다. 아무도 내 의사는 묻지 않았고 나조차 내게 그걸 묻지 않았다. 오전에는 종일 밥을 짓고 청소하고 엄마의 하루에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오후에는 엄마가 운영하던 공부방을 대신 운영했다. 오전 오후의 무급노동이 끝나고 몸이 녹초가 되어서 심야가 되면 개인과외를 했다. 한 달 60만원. 그게 내 수입의 전부였다.


그렇게 2년 가까이를 보냈다. 60만원을 쪼개고 모아서 이따금 서울에 올라와 수업을 듣고 독립잡지같은 곳에 객원에디터로 참여했다. 기를 쓰고 지방에서 올라와 회의에 가장 먼저 출석하는 나를 사람들은 부담스러워했다. 저희가 사정상 원고료를 이렇게밖에 못 드려요.. 교통비도 못 드리는 데 괜찮으세요? 다양하고 다정한 만류의 언어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당신들의 일이 내게는 숨구멍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그걸 글로 쓰지도 못하고 혼자 마음에만 담아두고 읊었다. 늦은 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이불 아래 가라앉은 엄마 옆에 나도 같은 마음으로 누웠다. 눈을 감고 모든 것을 경처럼 외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 혹은 다른 곳에서 벌어졌을 가상의 현재, 입밖에 내기엔 무서웠던 미움, 티내지도 못할 원망. 그런 것들을 밤새 입 안으로 외다보면 베개에 눈물이 스며 누린내가 났다. 그러면 다시 나는 서울에 두고 온 늪으로 돌아갔다. 그곳이 되려 안락했다.







항암 후 검진에서 뚜렷한 차도가 보였다. 이제 일 년에 한 번 와서 검진하고 약 타가시면 됩니다. 관리 잘 하시고요. 고생많으셨습니다. 엄마 정말 다행이야. 딸 다 네 덕분이야. 그런 말을 듣고 뱉는 동안 내가 내게서 점점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나와 더 불안해지는 마음 사이의 큰 틈. 발빠짐주의. 발빠짐주의. 그 다행이 오롯이 엄마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다급히 나의 다행을 찾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한 달 뒤 출발하는 도쿄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엄마 좀 회복되면 같이 가지. 아쉬운 소리를 하는 엄마의 눈을 피했다. 아빠의 헛기침과 찌푸린 미간, 허공을 향한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았고 아는 만큼 모르고 싶어 버럭 화를 냈다. 나도 혼자 있고 싶어. 혼자 있고 싶다고. 대단한 용기로 뱉은 말은 허무하리만치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예상했던 바였고 나는 조용히 짐을 쌌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종일 입을 다물고 낯선 거리를 걸으며 애써 지난 2년과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진득하게 달라붙은 버릇과 습관이 계속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엄마는 어떨까. 물냄새도 못 맡는 사람인데 밥은 어떻게 먹으려나. 이 커피 엄마도 좋아할텐데. 이런 빗자루 우리 집에도 있으면 편하겠다. 공부방은 어떡하지? 지금 곁에 없는 것들을 자꾸 옆에다 두려는 관성과 오롯이 혼자인 현재에 집중하려는 의식이 자꾸만 충돌했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지, 어째서 2만보를 걷는 내내 발이 빠진 느낌인 건지 알기 어려웠다.




집이 아닌 곳에서 스스로의 쓸모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걸 찾아 세상밖으로 나가야 했을 때 나는 늪으로 잠기길 택했다. 기실 그건 잠기는 쪽보다는 숨어든 쪽에 가까웠다. 이렇게 숨어서만은 안 되는데 하는 불안이 머리끝까지 차오를 때쯤 엄마가 아팠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고 말하면서 실은 그래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내 앞에 주어졌다는 안도감. 이걸 어쩌면 스스로의 방황을 설명하고 보호하는 무기로 삼을 수 있겠다는 비겁함.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고 나아가지 않고 머물러도 괜찮은 핑계가 생겼다는 감각들이 한동안의 나를 지켰고 이제 그건 곧 사라질 참이었다.





그러니 나는 이제 무엇 뒤로 숨어야 하나.

바다 건너와 찾은 늪에는 더이상 잠길 자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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