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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우 May 07. 2021

아무것도 하고 싶은게 없어요.

꿈에 대한 고찰 / 조각 에세이란

사람은 항상 특정 나이대가 되면 듣는 말들이 있다.


고등학교 때는 '숙제 너무 많지 않냐?' '어느 대학 갈거니?' '이번 시험 너무 어렵지 않았어?' '잠깐, 3번답 몇 번이라고?' 

대학교 때는 '너 수시로 왔어 정시로 왔어?' '동아리 어디 들어갈거야?' '국가장학금 신청했어?' '수업 째고 피방 ㄱ?' '오늘 (술) 달리자.'

자기소개나 면접 때는 '이 회사에 지원한 동기가 무엇인가요?' '어떤 것을 잘할 수 있나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소개팅 때는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 '낯을 많이 가리시나 봐요' '좋아하는 취미가 뭐에요?' '어머, 여행 좋아하세요? 저도인데!'

직장인이 된 친구끼리 만났을 때는 '연봉 얼마받냐?', '나 이번에 차 살건데 뭐가 좋아보이냐', '적금 얼마 모았어', '주식 이거 어떻게 하는거냐?' 등.


시시껄렁한 이야기다.

신기하게도, 살면 살수록 세상이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몸은 커지는데, 세상은 그대로라서 그런가? 아니, 대가리가 커지니 둘 공간이 비좁아진다고 하는 것이 맞다. 내가 갈 수 있는 길, 해야 하는 것, 듣고 살아야 하는 것이 정해져 있다. 그 틀을 벗어나고 싶어도 그동안 몇 십년간 살아왔던 패턴을 어느날 갑자기 부정하고 다른 사람처럼 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모든 사람이 위와 같은 삶을 산다고 못박을 수는 없겠지만, 난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산다고 자신할 수 있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그러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일 아침 출근을 위해 지하철을 탄 사람들의 같은 표정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고등학교를 나오고, 평범한 수능을 보고, 평범한 대학교에 가서, 평범한 학사를 따고, 평범한 직장을 가지고, 평범한 사람을 만나는 그런 삶.


물론 이런 평범함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평범한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고, 누군가는 오히려 이러한 삶을 바라기도 한다. 그래서 평범함이야말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이기도하다. 다들 그 '평범함'을 지켜내기 위해 아등바등 살고 있는 것이니까. 남들이 말하는 일명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자세히 돌이켜보면 사실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이유는,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사는 이유는, 단순히 평범함을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다.


딱히 하고 싶은게 없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딱히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어. 그럭저럭 지내는데, 굳이 꿈을 물어본다고? 연봉이나 좀 올랐으면 좋겠네. 남들 얘기를 듣다 보면 세계 여행도 가보고 싶고, 좋은 차도 타고 싶고. 이성 친구? 당연 좋지! 근데 어디 맞는 사람이 있나...


대다수의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면 꿈꾸고 있는 것, 목표하는 것이 비슷하다. 나이를 불문하고, 신기하게도 고민거리와 관심사가 점점 한 곳으로 모인다. 돈, 차, 직업, 결혼. 조금 달라봐야 여행? 유튜브? 특히 '버킷리스트'랑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몇가지'와 같은 용어는 누가 만든걸까? 이런 것들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점점 비슷해지는  같다. 현대 매체는 시시각각 변하는 트렌드를 사람들에게 빠른 속도로 전달해주지만, 정작 제대로 생각할 시간을 주지는 않는다.


꿈의 진정한 정의와 역할


꿈을 꾼다는 것은 축복이다. 어렸을 때는 "나도 마법을 부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는 "분명 꿈속에선 날았는데 왜 지금은 못 나는거지" 같은 아무 근거 없는 망상이라도 다. 하지만 점차 커가면서 현실을 알고나면 그 망상조차 사라져간다. 나도 모르게 생각을 하나씩 정리하고, 남들이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을 맞춰가게 된다. 꿈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러기엔 시간은 빠르고, 나이는 먹어가고, 챙겨야 할 은 많다.


나도 사실 고등학교때까지 아무런 꿈이 없었다. 아예 욕심조차 없었다는 것이 맞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나름 모범생 취급을 받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꿈이 '좋은 대학'을 가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을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꿈꾸고 있던 어떤 일을 이루고 난 뒤 도리어 힘이 빠졌다면, 그것은 꿈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눈 앞에 보이는 목표 또는 현실이었을 뿐. 꿈이라는 것은 그것을 현실로 이루고 나서도 '끊임없이 건설적인 다음'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꿈의 역할이다.


이 정의대로라면 좋은 대학교 간판을 따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좋은 차를 타는 것, 여행을 가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따위는 절대 꿈이 될 수 없다. 버킷리스트는 꿈이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한 계발'없이, 단순히 소비적인 행위를 바라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이루어지더라도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고,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이라는 공허함만 가져다 줄 뿐이다. 소망과 욕망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꿈이라는 것을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가치관을 확립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살 때에야 '나는 꿈꾸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꿈이란 결코 끝나지 않으며, 끊임없이 미래를 보여 주고,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이룩해나가게 된다.


나는 이 말을 납득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태어나서 공익근무를 마칠 때까지, 약 23년의 시간 동안 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 전까지는 내가 꿈꾸는 대로, 나의 의지로, '진정 하고 싶어서 한 일' 또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일'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29살이 된 나는 지금도 여전히 꿈을 꾸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어쩌다보니 조금 거창해졌지만, 사실 거창한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 속에서 내가 만들어진다'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자각하는 태도다. "앞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경험했던 것들을 글로 남길거야." 정도도 충분히 멋진 꿈이 될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 하루를 일기로 남겨보는 것도 꿈꾸는 자의 태도가 될 수 있다. 앞서 꿈이 아니라고 말했던 버킷리스트도 어쩌면 꿈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고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꿈을 꾼다는 것은 궁극의 자기계발이자 삶의 철학을 확립하는 과정이다. 이는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고, 만약 그것이 종교가 된다면 현세를 넘어 그 다음 세대까지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고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각 에세이는 나의 파편을 남기는 공간으로 그 때의 감정, 기분 또는 생각들을 기록한다. 조각이라는 말은 연속성있는 시리즈물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절단된 글이라는 뜻도 있지만, 삶의 일부분을 따왔다는 말도 된다.


하지만 가끔은 약간의 픽션도 넣을 생각이다. 나는 그것을 '조각의 재봉합' 과정이라고 부르는데, 예를 들어 15년도의 일과 19년도의 일을 마치 한 순간에 일어났던 일처럼 붙여서 서술하는 것이다. 또는 나와 상대의 입장을 거꾸로 뒤집은 다음 부분적으로 뒤섞기도 한다. 이는 나름대로 재밌는 일인데, 무엇보다 한정된 소재로 다양한 글을 쓰고 상상하는데 유용하다. 그 외에 넓게 펼쳐진 시간과 상황 요소에 가려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을 고려하는데도 좋을 듯하다.


어쨌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 그리고 내가 살고자 하는 삶, 혹은 살아야 하는 삶이 무엇인지, 최대한 흔적을 남기며 그 안에서 또 나를 발견했으면 한다.


경험은 간직하지 않으면 항상 날아간다. 살면서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많이 보았고 지금도 반성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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