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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우 May 01. 2021

소나기

지나간 시간과 마음은 비례하지 않는다

도시는 오늘도 깜깜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이따금씩 번쩍거렸, 가로등은 어둠을 밝히려 버둥거리는 촛불처럼 처절하게 늘어서있었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담배꽁초는 그런 가로등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침묵했다. 빨아 먹히고 버려진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평생을 지낸 사람들은 그런 도시의 모습을 보며 먹고, 배우고, 입고, 자랐다.


어지러널브러진 도시와 달리 하늘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한 치의 오점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새까만 페인트로 전체를 발라 놓은 상자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도 도시 안을 헤매고, 또 헤맸다. 개미처럼 바닥을 기고, 지렁이처럼 도시의 지하를 파고들었다. 그중 몇몇은 어둠 속 빛을 쫓는 나방처럼 향락가 간판 사이를 들락거리기도 했다.


그날의 나는 지렁이가 될 것을 택했다. 야근을 한 탓인지 뒷목이 꽤나 뻐근했고, 잠시 목을 젖혀 딱딱한 천장을 바라볼 때에 터널 끝에서 열차가 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덜커덕, 덜커덕.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헐떡이는 소리였다. 임종 전의 불씨가 확 불타오르듯, 아니면 발작 증세를 보이는 사람의 호흡 과다 같았다.


그때 한 승객이 마스크 뒤로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열차는 주변 공기를 게걸스럽게 삼킨 뒤 눈을 꿈뻑거리는 그 앞에 조용히 멈추어 섰다. 그리고 서른 두 개의 입을 활짝 벌려 그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이를 지켜보던 나는 더 이상 그 열차에 탈 수 없었다. 문득 그의 종착지가 궁금해졌다. 그는 어디로 향하고 있던 것일까. 언제부터 이런 삶을 살아왔던 걸까. 그리고 나는.




집 앞 사거리에 다다랐을 즈음 휴대폰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1.2.3. 빨간색 경고등과 함께 모니터의 숫자가 올라가고 있었다. 낯선 사람의 문자, 만난 지 3년이나 지난 친구의 문자였다. 졸업식 때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왔으니 한번 얼굴이나 보자는 것이었다.


얼굴. 그래 좋지. 다소 건조하게 답장을 보낸 뒤 나는 큰 X자형 횡단보도를 건넜다. 초록색 신호등이 깜빡거렸고, 지금 당장에라도 꺼져버릴 수 있다는 듯이 나를 협박했다. 걸음을 억지로 재촉당한 나는 횡단보도를 다 건너고 나서야 숨이 다소 가빠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단순히 신호등 때문이었는지, 오랜만에 연락을 한 그 친구의 문자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틀 후 나는 옛 학교 근처의 조그만 카페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비슷한 차림새였다. 얼굴엔 주름 하나 생기지 않았고, 헤어스타일도 학생 때와 똑같았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도시에서 표정을 지우는 방법을 제법 능숙하게 익힌 듯했다. 웃고 있었지만 웃음은 아니었고, 재미있는 농담을 던졌지만 딱히 재미는 없었다.


그 자리는 마치 형식적인 소개팅이나 면접 같았다. 이것이 '얼굴을 본다'는 것의 의미일까.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얼굴을 마주하는 여느 도시의 만남이었다. 왜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와 그 친구는 알지 못했다. 그저 서로의 패와 가면을 보며 단순히 시간을 죽일 뿐이었다. 그 순간 우리는, 미약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쏜살같이 빠져나가려는 바퀴벌레 같았다.


그 친구가 문득 서울 집값이며, 차며, 요즘 유행하는 주식과 암호화폐 이야기를 꺼냈다. 일종의 공감을 노린 하나의 패였다. 하지만 그것들은 나를 항상 바보로 만들고, 뒤쳐지게 하고, 재촉하는 것들이었다. 즉, 도시의 단어 그 자체였다. 정겨움은 없었고, 그 친구와의 거리를 더 멀게 느껴지도록 했다. 지방에서 사는 그 친구는 서울에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고 했다. 그는 이곳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갑자기 지겨움이 몰려와 크게 하품을 하고 싶어졌다. 하품을 하고, 이전에 봤던 그 승객처럼 열차에 너덜거리는 영혼을 맡기고 싶어졌다. 어쩌면 그때 그 승객도 지금의 나와 같은 상태였을지 몰랐다. 그 순간 나는 그 승객을 외면했던 과거가 부끄러워졌다.


결국 3년 만에 본 친구와의 만남은 3시간도 채 이어지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 절반, 1시간 30분의 싸움을 하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둘 앞에 남은 것은 이전에 짤막히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 내역 뿐이었다.




지하철 개찰구를 나오는데 문득 소나기가 내렸다. 구름 한 점 없었던 하늘이 축축해졌다. 나는 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개찰구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오늘 일을 되짚어봤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지만, 썩 유쾌하지 않았던 이유를.


그것은 지나간 시간과 마음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셈이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고 해서, 오랜만에 만났다고 해서, 항상 반가움이 동반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마음이고, 그 마음에 따라 시간은 항상 상대적으로 움직인다. 그리움은 3분의 시간을 3년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3년의 시간이 3분의 그리움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오늘 무엇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어쩌면 그 친구 역시 나처럼, 이 사회의 현실을 잠깐이나마 벗어나고 싶어했던 건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문자를 보낼 용기 만큼이나 그 잃어버린 표정을 찾기 위해, 진짜를 위해 '마음'을 썼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마음을, 내가 차갑게 외면한 것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그 친구의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화면의 자판을 꾹꾹 눌러 문자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잘 들어가.


그렇게 나는 소나기 속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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