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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우 Jun 20. 2021

미지근한 물이 식어가는 소리가 난다

마음이 변해가는 과정

조그만 스테인리스 주전자에 물을 담는다. 손잡이가 위쪽으로 둥그렇게 달린 흔한 모양이 아니라, 한쪽으로 길쭉하게 뻗어 손으로 가볍게 들 수 있는 찻 주전자에 가깝다. 타닥타닥 가스레인지의 성질 사나운 소리와 함께 파란 불꽃이 올라온다. 물이 그 위에서 천천히 달아오르고 있다.


잠시 이 집을 오래된 옛날 카페라고 상상해본다. 곱게 갈린 원두 옆에 물이 조용히 끓는다. 손님은 한둘뿐이지만 고풍스러운 원목 책상과 의자들이 텅 빈 공간에 무게감을 준다. 그 가구가 지낸 세월만큼 하얗게 머리가 샌 노인이 조용히 차를 따른다. 차 위에 노란색 꽃잎이 둥둥 떠 있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광경이다.


문득 독일에 가서 카페를 차리고 싶다고 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왜 하필 독일이고, 카페였을까. 나는 그것을 어떤 우아함을 좇는 것이라 생각했다. 국밥집, 떡볶이집보다 카페나 바를 한다고 하면 왠지 더 멋있어 보이기 때문일까.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우린 그렇게 느꼈다. 좋게 말하면 트렌드이고, 나쁘게 말하면 젊은 날의 환상에 가까운 느낌. 겉만 번지르르한, 가끔씩은 꿈이라고 말하는 허상.


카페를 가면 커피를 사는 것인지 분위기를 사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사실 난 커피맛을 모른다. 카페에 자주 가지도 않는다. 막상 가야 할 땐 그저 예쁜 곳을 찾을 뿐이다. 인테리어를 보고, 맛은 신경 쓰지 않는다. 맛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커피를 즐기는 사람, 그 사람들이 비슷하게 앉아 있는 것처럼, 금방 사라질 아름다움을 찾으러 간다.


주전자에서 하얀 김이 몽글몽글 올라온다. 투명한 유리잔에 물을 천천히 따른다. 잔이 따뜻하게 덥혀지며 안쪽이 하얗게 일렁인다. 사실 이 유리잔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 난 그저 따뜻한 물 한 잔이 필요했다. 유독 갈증이 느껴지는 아침엔 따뜻한 물 한잔이 좋다고 누군가 그랬다. 그래서 매일 아침을 그렇게 맞이했다. 갈증을 습관으로 채웠다.


갈증을 습관으로.

습관을 무력함으로.


빈칸에 답을 채웠음에도 빙글빙글 헛돌아 사라졌다. 정말 필요로 했던 것을 충족하면, 그것은 습관이 될 뿐이고 그런 습관은 아무 생각 없이 자행된다. 그렇게 아무 의미도 없이,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처럼, 서서히 무력감으로 변한다. 미래는 예민하게 뒤틀려 있어서 항상 이상과 어긋나는 법이다. 이제는 그 이상이란 게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잘 참는 것인지, 무딘 것인지, 실제로 덜 아픈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려서부터 감정의 폭이 크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고통을 잘 참는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문제다. 그저 내가 덜 아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 병원에서 앵앵 울어댔던 아이들이, 나보다 더 아팠던 것일지도 모른다. 배가 불렀던 것인지도 모른다.


잔에 담았던 물이 미지근해졌다. 미지근한 물이, 식어가는 소리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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