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앉아 사람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가 있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진료실 앞에 앉은 무명의 사람들은 아무런 표정도, 불평도 없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뒤늦게 간호사에게 이름이 불릴 때에서야 비로소 그 무명의 사람은 명(名)을 얻어 무거운 철문 사이로 들어가고, 이미 명을 얻었던 다른 환자가 차례대로 따라 나온다. 한쪽에선 무인으로 운영되는 결제 단말기가 영수증을 줄줄이 뱉어내고 있다. 이상하게도 병원에 있는 모든 것은 항상 이렇게 줄을 지어가는 습관이 있다. 염습이 끝난 사자(死者)를 따라 매장지로 향하는 운구의 대열처럼, 부산하면서도 적막하다.
나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차려입은 옷가지의 색깔과, 얼굴에 그어진 주름의 개수와, 간호사의 육성에 반응하는 손짓을 보며 그저 내 앞을 지나가는 또 다른 사람이구나를 느낄 뿐이다. 닫히는 철문 뒤로 인사를 나누는 그의 뒷모습과 의사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을 본다. 무표정. 의사도 진료실의 철문이 열릴 때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것일까. 사실 그것이 다가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발짝 다가간 것이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사람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먹는 존재다.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서는 절대 자신의 생명을 이어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위장 속으로 쌀을 밀어 넣고, 고기를 밀어 넣고, 풀을 밀어 넣으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 존재 자체가 폭력인 것들. 사람은 그런 자신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죄의식란 것을 느낀다. 그래서 죄의식이란 종교를 떠나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곧 참회의 무대였음을 알게 된다. 나도 모르게 죽음에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는 이유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죽음 끝에 선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픔과 죽음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도. 나는 그때서야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생명이 떨어져 가는데도, 다른 존재의 생명을 갈구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은 수명이 다할 때, 곧 모든 참회의 결과를 경건히 맞이할 준비가 되었을 때, 매일 먹던 밥에서 구린내가 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살면서 많은 폭력을 저질렀다. 단순히 생명을 먹고 마시는 것을 떠나서, 타인이라고 불리는 외부세계에 크고 작은 간섭을 많이 했다. 사실 정답은 아무도 모르는 것인데, 마치 아는 것처럼, 또는 그래야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외부 세계의 생과 사를 어지럽혔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거짓을 저질렀기에, 나는 병원을 오갈 때마다 나의 병이 그런 것들의 대가라고 생각을 한다. 혀에 생긴 하얀 반점을 도려낼 때마다 항상 죽음을 먹고 뱉었던 더러운 입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병원은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는 곳,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내가 저지를 폭력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곳인 것 같다. 병원에 앉아있는 아픈 사람들이 나와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도, 그저 지나가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이런 감정은 숙명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 사이의 동지애 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쩌면 병원이라는 곳은, 나 자신과 우리의 미래에 대한 절박한 예우 인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봤다. 그냥 없어져야 하는 것이 나을까. 그러나 자살은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무책임이자 회피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오랜 시간을 고민해보았지만 결국 책임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 그리고 나와 나를 둘러싼 외부세계에 대한 책임. 그렇지 않고서야,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존재의 대가를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