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왈드 챔버스 365 묵상집 주님은 나의 최고봉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당신이 믿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으면 그럴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하면 누군가 여전히 그 인생 가운데 계속 비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자신에게 다시 표현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리로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자신에게 표현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365 묵상집 중에서 발췌-
분별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기준점이 있어야 한다.
옳고 그름의 중심추 같은 역할이라고 할까?
시대에 따라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달라진다.
시대에 따라 미의 기준도 달라진다.
시대에 따라 도덕의 가치도 달라진다.
달라지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한다는 것에도 분명히 변하지 않는 기준점이 존재한다.'
그래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수 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수 있는 기준점은 딱 하나!
예수 그리스도.
부자 청년이 와서 묻는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부자 청년의 물음에는 오류가 있다.
그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 칭함은 그의 영생의 기준점이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질문에 "무엇을 하여야"라는 말에 그의 영생의 기준이 행위임을 아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부자 청년의 잘못된 생각은
선한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선함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강조하며 대답하신다.
왜 예수님은 선함이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의 기준을 아주 명확하게 분별하고 계셨다.
하나님의 선함의 기준점은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구원자가 되어 죄인들을 구원'하는 그 하나임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선함을 기준을 행위에 두고 있는 부자 청년의 생각을 교정시켜 주시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고 싶으셨다.
영생을 얻는 기준점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이다!라고.
그리고 그것이 선함의 본질이며, 그 본질이 바로 하나님의 선이다!라고.
부자 청년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관점으로 선을 많이 행한 랍비(선생님)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호칭부터 확신을 갖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과 확신으로 인해,
그는 진리의 기준점을 잃어버린 채 질문을 던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영생은 없는데,
영생에 관한 질문을 하니,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의 질문에는 교정이 필요하다.
"선생님, 당신은 누구이시며, 어떤 분입니까?"
작금의 시대에,
우리는 진리의 말씀의 기준점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을 4대 성인 정도로 치부하며
다른 신들과 동일한 선상 위에 올려놓고 칭송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화합과 대통합을 말하며, 종교는 하나다! 서로 화합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진리의 기준점이 사라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진리의 기준점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우리는 올바른 질문을 해야 한다.
"예수님! 당신은 누구시며, 어떤 분이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아주 명확하게 한 예수님의 제자가 있다.
바로 베드로다.
"주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시니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구원자)!
그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의 기준점이다.
그 기준점은 절대 타협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건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영생,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에 알아가는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게 임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