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시선
남자는 스스럼없이 다가갔고 여자는 조심스러웠다. 남자는 항상 먼저 다가가 함께 놀기를 바랐다. 그리고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일단 손을 잡고 놀려고 했다. 그에 여자는 질색을 하며 밀어냈고 여자의 엄마는 싫다는 표현을 가르쳤다. 만원 버스 안에서 몰래 엉덩이를 쓰다듬는 성추행범을 대하듯.
남자가 뭔가를 갖고 놀면 여자는 따라와 밀쳐냈다. 반대의 상황도 물론 벌어지지만 때때마다 여자의 엄마는 남자에게 양보를 가르쳤다. 이쯤되면 엄마도...
남자가 20번을 다가가면 여자는 한 번 정도만 접근을 허용했다. 기분이 좋을 때? 그 외에는 반경 50m 내외의 접근을 불허했다. 시소도 미끄럼틀도 계단 오르내리기도 함께 할 수 없었다.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대도 남자는 눈치 없이 다가갔다. 엄마는 그때마다 남자를 억지로 들어 올려 떼어놓아야 했다. 싫었다. 여자가 싫어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남자가.
사회에서 처음 맺은 관계였다. 남자는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했다. 여자가 인사를 받아주지 않으면 주위를 서성이며 여자의 기분이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여자가 빵이나 떡, 과자, 아이스크림을 들고 나타나면 남자는 더욱 집착했다. 엄마는 초코를 주지 않으니까! 배가 터질 듯이 불러도, 먹을 것 앞에서는 늘 진심이었다. 여자의 엄마가 나눠주기를 부탁하면 여자는 크게 인심을 쓰며 개미 눈물만큼 떼어줬다. 남자는 그것도 좋다고 허겁지겁 먹어댔다. 방금 먹고왔잖아, 너?
자주 만나지 않으면, 다른 친구가 생기면 덜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면 경기도 오산! 오랜만에 만나면 반가움은 더욱 극대화되었다. 긴가민가 애매할 때 급히 방향을 틀어야 하는데, 아이가 항상 한 발 빨랐다. 시력이 좋았다. 멀리서도 여자를 알아보고 달려갔다. 다른 친구가 있는데도 남자는 여자 곁을 떠나지 못했다. 여자가 그네를 타면 그네를 탔고 여자가 엄마 옆에 서면 남자도 엄마 옆에 섰다. 여자가 하는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때마침 여자의 엄마가 아이스크림으로 회유하며 자리를 뜨려는데, 남자가 따라나섰다. 그걸 또 여자는 손으로 막아서며 제지하고... 실랑이 끝에 겨우겨우 떼어놓았는데, 이제 막 잠잠해졌는데 여자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남자는 다시 그 옆으로 다가가 한입만! 을 시전한다. 아이스크림을 사줘야 했다. 그래야 끝날 것 같으니까.
여자는 말도 잘했고 키도 컸다. 어느 면에서 봐도 자기가 우월하다고, 남자가 자기와 동급은 아니라고 생각할 법도 했다. 또한 여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자기가 어떻게 해도, 이 남자만큼은 자기 곁에 있을 거라는 것을. 그렇게 자신이 무시하고 얕봤던 남자가 리드하려는 순간, 어긋났던 것 같다. 감히? 네가? 남자는 다시 여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함께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그네 타기 하나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뭐가 좋다고 여자 곁을 떠나지 못하는 걸까. 인사를 해도 쌩, 말을 걸어도 쌩! 찬바람만 부는데도 그저 좋단다. 이 여자한테만 그랬다. 인생 첫 친구의 의미가 이렇게도 큰 걸까. 함께 뛰어놀다가 소꿉놀이를 하다가 티격태격하며 토라졌다 풀어졌다 하는 거였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이건 일방적인 구애, 짝사랑 보다 못했다. 세상 찌질했다.
아이는 울었다가도 금방 웃고, 토라졌다가도 금세 풀렸다. 오늘 받은 상처가 내일까지 지속되지 않았다. 그래서 늘 반갑게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그런데 엄마는 아니었다. 엄마는 아팠다. 그렇게 집에 들어오면 말할 수 없이 속상했다. 잠을 자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씻다가도 훅! 올라왔다. 그 어떤 감정들보다 잔상이 오래 남았다. 무시당하는 건.
그 여자가 너 우습게 생각하는 거야. 비웃었단 말이야. 그 여자도 그 여자 엄마도 은근히 즐기는 거 모르지? 엄마는 아는데 왜 너는 몰라. 바보 같이. 인사를 받아주지도 않고, 말을 걸어도 답이 없고, 같이 놀아주지도 않는데 이제 그만 좀 얼쩡거려. 제발.
핏대를 세우며 이야기를 해도, 좋게 타일러도 아이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아이는 이제 고작 네 살이니까. 그... 고작 네 살 여자아이를 상대로 난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