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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May 03. 2022

야, 너도 할 수 있어

#기자 #일 #자신감

첫 직장에서 기자로 일할 때였다. 어느 날 보도팀 선배들과 회식을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넓은 스마트폰 화면에는 언론고시반 친구의 이름이 나타났다. 당시 홀로 지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라서 그런지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한편으로 불과 서너 달 전에는 기자 지망생이었다가 기자로 신분이 바뀌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마침 술자리에서 벗어날 핑곗거리를 찾고 있던 터라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마트폰 화면을 검지로 쓸어내리면서. "여보세요, 나야 오빠!"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얼어붙은 마음이 녹았다. 


그날로부터 반년 전, 그러니까 테이프를 봄에서 겨울로, 겨울에서 가을로 되감아 보자. 그때 나는 언론고시반의 골칫거리였다. 고시반 출석률은 물론이고 스터디 출석률도 낮았다. 무엇보다 고시반원을 한두 명씩 데리고 술집에 갔다. 고시반 회의에서 학습 분위기를 흐리는 주범으로 낙인 찍힌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급기야 나는 구두 경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나를 감싸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 말은 사실상 퇴실 조치를 할 수 있다는 최후통첩이었다.


그녀는 고시반 기자 스터디의 일원이었다. 당시 고시반 기자 지망생들은 크게 두 부류도 나뉘었다. 한 부류는 서울에 남으려고 했고, 다른 한 부류는 지방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후자에 속했다. 기차로 버스로 지방에 시험을 치르러 다니면서 동지애도 깊어졌다. 내 앞길을 가로막았던 벽에 작은 문이 생긴 건 지방에서였다. 지방사에 지원하기 전까지 나는 고시반을 지키는 쪽이었다. 서류 전형에서 거듭 탈락해서다. 시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내가 있을 곳은 고시반밖에 없었다. 필기와 면접을 보러 가는 친구들의 합격을 기원했다. 한편으로 응원받는 건 내 몫이 아니어서 착잡했다. 방황했다. 고시반 대신 술집으로 발걸음을 향하는 날이 늘어갔다.


행운은 밀린 임금을 지불하듯이 연거푸 왔다. 나는 한 지방 방송사 필기를 필두로 시험 기회를 계속 잡았다. 경험이 더해질수록 자신감이 붙었다. 필기시험 서너 번에 한 번 꼴로 면접 전형에 올라갔다. 뒤늦게 시동이 걸린 셈. 한편 고시반은 연말이어서 그런지 한 템포 쉬어가는 분위기였다. 밤늦게까지 고시반에 홀로 남아 있는 날이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에도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도 나는 외로웠다. 그해를 넘기지 않고 합격하길 바랐는데 12월 말쯤 한 방송사로부터 합격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안부를 묻더니 이내 언론고시반 근황을 전했다.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높았다. 필시 좋은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누가 어느 방송사 PD에 합격하고, 누가 어느 신문사 기자가 됐다는 둥 불과 몇 달 사이의 경사를 알려줬다. 문득 어떤 일이 이뤄지기 전에 포기하는 이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결승선이 목전인 걸 알지 못한 채 멈춰 선다. 물론 빨리 그만두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다른 길에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아무도 내일을 모른다는 거다. 나는 정말 잘됐다고 화답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그녀는 이게 다 내 덕분이라고 엉뚱하게도 나를 치켜세웠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내게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기자에 붙고 언론고시반 공기가 달라졌다고. 연말 어수선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이른바 열공 모드로 전환됐다고 했다. 분위기 쇄신에는 내 합격 소식이 한몫을 했단다. 한마디로 쟤도 합격했는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거다. 한 광고에서 조정석 배우가 고객들의 눈을 보면서 말한 “야, 너도 할 수 있어”를 내가 몸소 보여준 셈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칭찬인 듯 칭찬이 아닌 듯한 말에 헷갈렸지만, 내가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사람들은 재벌 같은 부자들을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이 큰돈을 벌면 시기한다는 거다. 사람들은 사촌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게 설계되어 있는 모양이다. 반대로 잘난 사촌에게 배우려고 하지 않는단다. 인생의 롤 모델을 구할 때에는 엉뚱하게도 멀리서 찾는다. 생전 만날 일이 없는 스티브 잡스나 피터 드러커 등 유명 인사의 삶을 좇는 거다. 하지만 롤 모델을 주변에서 찾는 게 낫다고 한다. 유명 인사들이 현실에서 너무 멀게 느껴져서라고. 그렇다면 나는 합격 소식으로 고시반 친구들에게 진 빚을 어느 정도 갚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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