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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May 08. 2022

익숙해지지 않은 일

#상처 #걱정 #아토피

뇌는 짙은 안개에  적신 듯이 흐리멍덩했다. 온몸에서는 기운이 일시에 빠져나갔다. 지금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데, 졸음보다 적확한 단어를 찾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1  생일 다음으로 가장 행복해야  어린이날 대낮에 벌어진 사태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삼십 대 후반이면서도 여전히 어린이날을 기다린다. 대략  가지를 의심했다.


1. 수면시간 부족

2. 건강 이상


태어나고 줄곧 바뀌지 않은 게 있다. 바로 수면시간이다. 아직도 신생아처럼 자야 개운하다. 하루에 9시간 이상을 자진 못하는데, 걱정 인형처럼 온갖 걱정을 달고 살아서다. 전날에도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걱정하느라 새벽녘에야 잠들었다. 다행히 주말이어서 해종일 늘어지게 잤다. 즉, 잠이 모자란 상태는 아니라는 뜻이다. 일단, 수면 부족은 용의선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나 같은 걱정 인형들이 의지하는 데가 있다. 다름 아닌 운세다. 나는 띠별 운세, 별자리 운세, 타로 운세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운세들을 모시고 산다. 운세는 불안에 떠는 이를 격려해 주는 동시에, 시건방을 떠는 이에게 옐로카드를 보여준다. 이렇게 삶의 밸런스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줘서다.


한데, 운세에서 5월에 한 목소리로 경고한 게 건강이었다. 몸에 이상 증세가 감지되면 지체 없이 의사 선생님을 만나라고 했다. 나는 불과 반년 전에 받았던 건강 검진 결과를 머릿속으로 더듬어 봤다. 딱히 짐작이 가는 건 없었다. 당시 아토피 피부염 말고는 특이 사항이 발견되지 않아서다. 그때 목에 걸린 가시처럼 짚이는 게 있었다.


백팩을 샅샅이 뒤졌다. 단행본 틈에서 구겨진 처방전을 발견했다. 며칠 전 병원 피부과에서 받은 거다. 약품명은 도무지 눈에 익지도 입에 붙지도 않았다. 아토피로 병원에 다닌 지 4년이 되었는데도 그리스 로마 신의 이름처럼 낯설기 그지없다. 약품명을 훑어내려 가다 눈이 한 단어에서 멈췄다. 아젭틴정. 이번에 새로 처방받은 약이다.


아젭틴정은 2세대 항히스타민제로 알레르기성 피부질환에 효과를 나타낸다. 한마디로 아토피 환자들을 가려움증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가려움증만 멈추게 하면 좋으련만 혹을 붙여준다. 졸음과 피로, 몽롱함이 따라붙는 거다. 세상만사 얻는 게 있으면 내어 줘야 하는 것도 있는 법. 물론 1세대보단 졸음이나 진정작용이 덜하지만, 사람에 따라 편차가 있게 마련이다. 아젭틴정이 내게는 세게 작용한 모양이었다.


이놈, 첫 만남부터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따라 약국에는 손님들이 많았다. 아젭틴정이 포함된 약 꾸러미를 한 아름 안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대기하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뜨거운 게 훅 치밀어 올랐다. 백팩에 약봉지를 허겁지겁 구겨 넣고 지퍼를 채웠다. 도둑질을 하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피부과에 가는 일도, 약국에 가는 일도 처음이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예고 없이 찾아온 부끄러움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나는 제법 의연하게 버텼다고 생각했다. 참,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게 있다. 항히스타민제 부작용도, 약을 한 아름 타는 일도, 아토피 피부염도. 이럴 땐 적응하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다. 시간이라는 마법이 해결해주길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세상에는 인간의 자유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많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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