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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May 25. 2022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 글 짓는 법

#글쓰기 #이야기 #벽 #루틴

회사에 다니면서 글은 언제 쓰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럴 때마다 ’여자 친구가 없어서 시간이 많아요.’라고 답하려다 모양 빠져 보일까 봐 “어, 뭐 그냥 틈틈이 씁니다.”라고 얼버무린다. 나름의 신비주의 전략이랄까. 사실 신비할 것도 신비하게 보이도록 감출 것도 없다.


글짓기 고통을 말하자면 이렇다. 보통 퇴근길 차 안에서 그날의 글감을 고른다. 머릿속에서 글감을 말풍선처럼 떠올리고 펼쳐 보이다가 터뜨리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그중에서 이놈이다 싶은 걸로 정하고, 집 근처 카페에서 본격적으로 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매번 공장에서 레고 블록을 찍어내듯이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는다. 실은 매번은커녕 대부분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집에 도착하도록 글감도 정하지 못한 나머지 카페에 패잔병처럼 터덜터덜 들어서는 일이 다반사다. 이런 날에는 차라리 교통체증이 반가운데, 오늘이 꼭 그랬다. 궁여지책으로 머릿속에서 썼다 지웠던 연애편지 같은 후보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1번 후보 에스프레소. 요즈음 소셜 미디어에서 에스프레소 바가 유행이다.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데미타세를 탑처럼 쌓은 인증샷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일 말이다. 당연히 에스프레소 바 순례나 다채로운 에스프레소 메뉴를 쓰려는 건 아니다. 에스프레소와의 첫 만남에 대해 생각했다. 첫 만남은 늘 설레기도 하고, 창고에 먼지 쓰고 버려진 추억 하나쯤 팔아도 괜찮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그, 추억 팔기 딱 좋은 날씨 같기도 했고.


에스프레소를 알게 된 건 군 제대 후 복학한 즈음이었다. 그 무렵 카페에 자주 갔다. 커피값이 만만치 않았다. 가장 싼 축에 속하는 아메리카노도 밥값과 비슷했다. 카페라테나 카페모카, 캐러멜 마키아토 등을 마시는 날에는 저녁을 건너뛰어야 했다. 말 그대로 사치였다. 밥값보다 비쌌으니까. 프랜차이즈 카페가 대학생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줄리도 없었다.


그때 에스프레소와 만났다. 운명이라는 진부한  이외에는 그날의 만남을 표현할 길이 달리 없다. 학교 정문  백반집에서 오천  짜리 제육볶음을 먹은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식후 카페에 들렀다. 이렇게 커피를 마시다가 정말이지   생각이 없다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아메리카노로 배를 채우는 결식 대학생이   같았다. 그날따라 메뉴판에서 에스프레소가 반짝거렸다. 에스프레소 옆에는 2,500원이라고 나란히 적혀 있었다. 매력적이면서 합리적인 값이었다. 이렇게 나는 에스프레소와 만났더랬다. 대충 이런 이야기다.  에피소드를 휴지통에 버린  평범한 소재를 맛깔나게 요리할 자신이 없어서다.


2번 후보는 평화다. 성당에 나간 지 두어 달 됐다. 실로 오랜만에 미사에 참례했다. 미사 중간쯤이면 신부님이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길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궁금증이 피어났다. 곧이어 신부님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시라고 하면, 사람들은 합장한 채 평화를 빈다면서 목례했다. 하지만 평화를 빈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동안에도 의문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답답한 나머지 국어사전에서 ‘평화’를 찾아봤다.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번에는 ‘평온’이 무엇인지 아리송했다. 다시 사전 앱을 열었다. 평온의 정의는 조용하고 평안함이다. 그러면 ‘평안’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다 사전이라는 미로 속을 헤매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바람에 미쳐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도 평안에 이르러 의미가 바투 와닿았다. 사전에 따르면 평안은 걱정이나 탈이 없는 상태를 의미했다. 이렇게 쉬운 말로 풀어 써 있으면 좋으련만. 종합해 보면 평화는 갈등이 없고 무탈한 상태이다.


답을 구하는 여정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성경에서 이 말씀을 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 뭐가 다르다는 걸까. 또 하나의 장벽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게임에서 어렵사리 한 판을 깨고 나면 다음 판에서 더 센 왕이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한 신부님은 이렇게 풀어 설명해주셨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실천하면서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그 숭고한 의미를 겨우 냉담자 신세를 면한 나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일단 메모만 해둔다. 언젠가 글감을 온전히 소화할 수 있을 때 다시 꺼내는 수밖에.


전자는 글감이 보통이고 후자는 글감은 괜찮은데 아직 감당하기 어려웠다. 둘 다 글감 탓을 한 셈이다. 결국 재료를 갖고 글을 짓는 실력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집안의 냉장고를 그대로 스튜디오로 옮겨와서 냉장고 속 그저 그런 재료로 레스토랑에서 나올 법한 요리를 만드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매번 화장 전후 얼굴처럼 변신한 재료들을 볼 때면 절로 입이 벌어졌었다.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낸 건 셰프들의 실력이었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감이 평범해도 특별한 글로 완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어떤 소재가 주어져도 평균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글을 끝까지 읽게 만들고 읽는 맛도 내고 다 읽고 나면 마음에 남는 것도 있었다. 독자에서 작자가 되어 보니 더 절절하게 느낀다. 글짓기에는 자격증도 급수도 없지만 다음 레벨로 도약하려면 갈 길이 구만리라는 것을. 사실 도착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인 건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붙잡고 끙끙대면서도 그 과정을 즐기듯이 글 짓는 일이 내게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음번에는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길. 또 욕심을 낸다.


"보통의 것이 좋아(반지수 작가)" 일러스트 전시회에서 촬영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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