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여행 #우연 #인생
아무런 계획 없이 뉴욕까지 무작정 날아가는 여행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뉴욕에 가서 뭐라도 보면 되겠지 싶었다. 맨해튼의 숙소만 예약하고 훌쩍 떠났다. 뉴욕 명소라고는 플라자 호텔과 센트럴 파크, 타임 스퀘어를 아는 게 고작이었다. 사실 케빈과 싸이가 아니었으면 그 정도도 몰랐을 것이다. 그땐 내가 모마, 그러니까 뉴욕 현대미술관에 푹 빠질 줄 미처 알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로 태어난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본 투 비 똥손인 게 틀림없는데, 여섯 살 때 유치원보다 미술학원에 먼저 갔지만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재능이 있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를 지도했던 선생님들은 칭찬에 인색하거나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나도 딱히 그림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오히려 잿밥에 관심이 많았다. 미술학원 구석에 있는 미끄럼틀을 타려고 학원에 갔을 정도. 특히 정물화는 수학만큼이나 질색이었다. 둘의 공통점은 엉덩이가 무거워야 잘한다는 것인데, 한자리에 도통 붙어있질 못하는 내게는 맞갖지 않았다. 풋사과와 화병 따위를 그릴 즈음 학원을 그만뒀다. 풋사과처럼 실력이 무르익기도 전이었다.
맨해튼에서는 한인 민박에 묵었다. 나는 2인 1실에 짐을 풀었다. 맞은편 침대의 남자는 생애 첫 미국 횡단 여행을 앞두고 한껏 들떠 있었다. 한 달에 걸쳐 동부 뉴저지에서 서부 LA까지 가는 여정이라고 했다. 뉴욕에는 사나흘 간 머무는데, 트렁크에 빈틈없이 짐을 싸듯이 일정을 짜 왔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내일 어디 가실 거예요?"
나는 이렇다 할 일정이 없었기에 도로 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그는 뜸 들이지 않고 답했다. 면접을 앞두고 수없이 연습한 것처럼. 그건 분명히 반복의 산물이었다.
"오전에 모마에 가고 오후에는 록펠러 센터, 타임 스퀘어에 들르고 저녁에는 뮤지컬을 볼 거예요."
나는 대뜸 같이 다니자고 했다. 어차피 혼자 온 데다 별다른 계획도 없는 터였다.
"그런데 모마는 뭐예요?"
모마는 한인 민박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의 빌딩 숲 사이에 숨어 있었다. 준비성이 철저한 동행인이 아니었더라면 자칫 수많은 맨해튼의 빌딩 중 하나로 지나칠 뻔했다. 모마의 벽 전체는 유리창으로 지어져 있었다. 현대 건축의 총아인 대형 유리창을 전면에 내세운 모습이 과연 현대 미술관다웠다.
처음으로 들어간 전시실 중앙 벽면에서 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을 만났다. 순백의 삼각팬티만 입은 남자가 허리춤에 두 손을 짚고 있는 그림이었다. 인상적인 건 남자의 눈이었다. 그는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그 남자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전시실에 함께 입장한 관람객들이 모두 자리를 뜨고 또 다른 무리가 들어오고 또 나갔다. 돌이켜보면 그때 이미 나는 모마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날 클라이맥스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이었다. 전시실 벽면을 통으로 그득 채운 캔버스 앞에서 나는 그만 말을 잃었다. 여기에 계속 머무느라 다른 작품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개의치 않을 것 같았다. 아예 전시실 한가운데 긴 의자에 눌러앉았다. 가까이에선 다만 붓질에 지나지 않았는데 멀리서 보니 수련이었다. 나는 인상파 화가의 수련에서 아이들이 하교하고 텅 빈 운동장의 평온함을 느꼈다. 구글로 안방에서 명화를 볼 수 있는 세상이지만, 실제 공간에서 실제 사이즈로 작품을 보는 건 단순히 보는 것 이상의 체험이었다.
뉴욕을 떠나기 하루 전 서점에 들렀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매대에서 뉴욕 방문 기념으로 쩐노랑 스케치북을 골랐다. 내 손바닥보다 조금 컸다. 만듦새가 짱짱한 데다 주변의 작고 단순한 사물을 그리기에 적합해 보였다. 이번에는 그림 실력이 누런 벼처럼 무르익기를 기대하면서.
다시 드로잉을 하면서 배운 건 상상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시간을 들여 사물을 관찰해야 했다. 드로잉이 아니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면도기와 구두, 필통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그러자 사물이 점과 선과 기울기로 인식됐다. 모네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림을 그리러 나갈 때, 당신이 전에 갖고 있던 대상에 생각은 잊도록 노력해라. 단지, 작은 파란색 정사각형, 핑크색 직사각형, 노란 선들이라 생각하고, 당신에게 보이는 그대로 정확한 컬러와 모양을 그리라고.
실은 뉴욕에 가기 전 머릿속이 산란했다. 살면서 처음 맞닥뜨린 일에 허둥지둥거렸다. 저글링 하던 공을 모두 손에서 놓친 것처럼. 여행을 다녀온 후에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다. 흐릿한 답이 뚜렷이 보인 것도 아니다. 다만 복잡다단해 보이는 문제의 본질이 점과 선처럼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게 사물의, 문제의, 삶의 본질일 지도 모르겠다.